232page

2 부 경기도 지역 3·1운동의 전개 231 게 된 커티스·테일러·언더우드 등에 의해 사건 소식이 서울에 알려지게 되었 고, 그 뒤를 이어 개인적인 차원에서 스코필드가 여러 차례 방문하여 부상자 치 료와 난민 구호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4월 19일에는 영국 대리영사와 노블을 비 롯한 감리교 선교사들이 현장을 답사하였다. 이후에도 노블을 비롯한 감리교 선 교사들은 제암리와 수촌리 등지를 자주 방문하여 부상자 치료와 난민구호에 나 섰다. 감리교 선교부에서는 선교비 2천 원을 긴급 지원하여 교회와 교인 집 복 구비로 사용케 하였다. 그리고 선교사들은 현장 증언을 담은 보고서를 작성하여 안식년 휴가를 얻 어 본국으로 들어가는 벡크를 통해 미국 교회에 진상을 알렸다. 또한 외교 경로 를 통해 총독부에 제암리 만행을 항의하며 구호대책 마련을 촉구하였다. 이미 평남 강서, 평북 정주·곽산 등지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건들이 일어나 선교사 들로부터 항의를 받고 있던 총독부로서도 더 이상 묵과할 수만은 없어 총독 자 신이 4월 20일 제암리 현장을 방문하였으며 복구비로 ‘1천 5백 원’을 내놓았다. 제암리사건으로 한국 내 선교사뿐 아니라 외국 여론까지 악화되자 조선군 사령부에서는 사건 주범인 아리타 중위를 7월에 군법회의에 회부하였다. 그리고 제암리사건의 원인이 된 수촌리와 화수리 토벌작전을 수행했던 지휘관들도 문 책하는 형식을 취함으로 악화된 여론을 돌리려 하였다. 그러나 이런 조치는 악화 된 여론을 돌려보기 위한 기만책에 불과하였다. 이 사건의 근본 원인이 된 일본 의 한국 지배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를 기대할 수 없는 미봉책에 불과했다. 그런 점에서 선교사들의 사후 대책도 부상자를 치료하고 불탄 교회와 교인들의 집을 복구하고 위로하는 수준에서 더 나가지 못했다. 다만 선교사들의 증언을 통해 이 사건이 해외에 알려지고 미국 국회에서도 청문회를 열어 일본의 야만적 행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