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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 한권으로 읽는 경기도의 3·1운동 대들은 6명의 시체를 모아놓고 짚가라의 짚을 날라다 쌓아 놓 은 후 불을 질렀다. 김주업은 결 혼한 지 3일만에 참살을 당한 것 이었다. 당년 9세인 김세열의 아들 김덕기는 김주업의 처 한씨가 끌 어 당겨 치마 폭에 감추어 간신 히 목숨을 건졌다. 한씨 부인은 너무나 잔인한 참살현장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아 3일만에 죽었다. 그 후 수비대들은 시체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하다가 3일이 지나서야 묻는 것을 허가하였다. 이 동리 김시열은 고문의 여독으로 불편한 몸을 이끌고 동리 주민들과 함께 이들의 시신을 추려 팔탄면 월문리 공동묘지에 분묘를 만들었다. 제암리 학살사건의 반향 사건이 일어난 후 제암리를 비롯한 고주리, 수촌리, 발안 등지는 공포 분위기에 휩싸였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수원지역의 만세시위가 급격히 줄어들었다는 점 에서 일본 측의 진압 의도는 나름대로 성공을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 건 직후 현장을 방문한 외교관과 외신기자, 선교사들을 통해 사건 진상이 외부로 알려지면서 일본 측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상황으로 전개되었다. 4월 6일에 일어난 수촌리 마을 방화사건에 대한 소식을 듣고 4월 16일 현 장을 확인하기 위해 수촌리로 가던 중 의외로 제암리사건 현장을 처음 목격하 파괴된 제암리 마을과 주민들(독립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