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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부 경기도 지역 3·1운동의 전개 225 그때 가족 모두 부친이 계신 사업장으로 피신을 갔답니다. 그곳이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죠. 그 후 군대가 와서 우리는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 뒤 군대가 교회를 둘러싸고 석유로 불을 질렀죠. 이에 수비대장은 각종 정찰을 편 결과, 동지방 소요원인은 향남면 제암리( 발안장에서 서남 약 15정 위치에 있음) 의 예수교도 및 천도교도에 있다고 파악하고 4 월 15일 부하 11명을 인솔하고 순사, 순사보와 함께 제암리, 고주리에 이르러 만 행을 자행하였던 것이다. 제암리 학살사건의 내용 3월 31일 발안 장날 시위와 4월 3일의 화수리, 수촌리 시위가 벌어진 후 발안은 주요 경계 대상이었다. 헌병을 중심으로 편성된 1차 검거반은 4월 5-6일 발안 에 주둔하며 수촌리를 습격하여 마을을 방화하였고, 2차 검거반도 4월 10일부 터 11일까지 발안을 중심으로 수촌, 화수리 지역을 수색하여 204명을 검거하였 다. 이들 검거반이 남양 방면으로 이동한 후 발안지역 치안을 맡기 위해 지원 나 온 부대는 육군 ‘보병 79연대’ 소속이었다. 중위 아리타가 지휘하는 보병 11명 이 발안에 도착한 것은 4월 13일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임무는 토벌 작전이 끝 난 발안 지역의 치안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지역의 시위 주모자들 은 2차에 걸친 검거 작전으로 대부분 체포된 반면 발안 시위를 주도했던 제암리 주모자들은 체포되지 않아 불안 요소로 남아 있음을 안 아리타는 제암리를 토 벌하기로 하였다. 아리타는 4월 15일 오후, 부하 11명을 인솔하고 일본인 순사 1명과 제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