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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 한권으로 읽는 경기도의 3·1운동 본군은 금광이 많아 현재 4광구, 사금 2광구가 있고, 출원 중인 것도 있어 금광 총면적 195만 3천평, 사금광 9천400평으로 어느 광구든지 상당한 이익을 올려 한편으로 보면 용인군은 금광으로 존재한다고 인정되고 있다. 라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금광 및 사금이 중요한 자원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리고 이 금광과 사금이 용인군 원삼면 안골, 미평리 등지에 펼쳐져 있었음은 이 지역 주민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러한 점을 통해서 볼 때 1910년대 에 용인 원삼면 지역에는 일본인 자본가들이 진출하였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용인지역의 대표적인 지역신문인 《용인시민신문》 <자연마을 순례>에서 이 지역을 답사한 우상표 기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어 이 지역 금 광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일제 당시 금광(또는 금점)은 안골마을부터 미평뜰까지 형상되어 있었다. 미 평에서는 주로 백금점이었고, 안골은 석금을 채취했다. 금점이 얼마나 번성했 는지 여기저기 펼쳐진 모습을 보고 “만벌탕같다”는 애기를 했다고 한다. 한밤 중에도 대낮처럼 전기불로 밝혔음은 물론이다. 외진 곳이어서 안골이라 하지 만 일제때는 관방이 있었고, 전기까지 들어온 것도 그탓이다. 직책과 일이 세 분화된 금점에서는 자금을 가지고 투자하는 사장을 “연상”이라 불렀다 한다. 현장 소장격인 감독은 “덕대”라 했고, 그 밑으로 인부들이 있었다. 돌과 모래 가 섞인채 채취한 금을 물에 씻어 분리해 내는 일은 “함지질꾼”이라 했다는데 이무래도 가장 힘든 일은 금 채취 굴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을 퍼내는 일이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