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page

168 한권으로 읽는 경기도의 3·1운동 는 자를 참살하고 (현장순국 3명), 양민의 상투를 줄줄이 묶어서 안성 경찰서까지 30여리 길을 걸려서 연행했다. 이때 투입된 일본군은 보병 79연대 소속 하사 이 하 30명이었다. 일제의 군경 합동 검거반의 이러한 검색과 만행, 기만전술에도 불구하고 주 동인물 가운데 이희룡, 이양섭만 검거되고 나머지 최은식, 이덕순, 이근수, 이유 석, 홍창섭 등은 검거하지 못하자 부모, 형제, 친척을 앞세워 유인하거나 이들을 붙잡아 대신 매질을 하고, 동리 사람들의 신고를 조장했다. 이러한 갖가지 방법 을 통한 일제의 탄압으로 이곳 주민들이 치룬 희생은 다음과 같다. 현장순국 : 3명, 안성경찰서 고문순국 : 5명, 서대문 형무소 순국 : 9명, 부상 후 순국 : 7명, 피검자 수 : 361명 이상(훈계방면자 제외), 옥고 : 127명 (선고전2, 복역중 순국 7명포함), 가옥 방화 소실 : 9동 위의 인적·물적 손실 이외에도 시위 중 파괴된 일제 재산에 대한 배상과 일부 피고의 공소 비용 26원 78전까지 부담시켰다. 결어: 안성지역의 3·1운동의 특징 원곡 양성지역의 3·1운동은 1919년 4월 1일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과 양성면에 서 일어난 만세 운동으로 농민층이 주류가 되어 일으킨 대표적인 항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지역의 만세운동은 특히 2,000여명이나 되는 다수의 민중이 참 여하여 주재소, 우편소, 면사무소, 일본인 상점 가옥 등을 파괴 또는 방화한 대표 적인 공격적인 만세운동으로서 높이 평가받고 있으며, 또한 경부선 철도 차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