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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부 경기도 지역 3·1운동의 전개 159 다음은 이 마을이 불길에 쌓여진 당일의 상황이다. 4월 11일 새벽 마을 사람들은 집이 불타는 소리와 연기 냄새로 단잠을 깨싸. 마당으로 달려나온 사람들은 경찰과 군인들이 불을 지르는 모습을 볼 수 있었 다. 사람들이 뛰어나오자 그들은 총격을 가하고 매질을 했다. 사람들은 목숨을 보존허기 위해서 노소를 불문하고 산으로 도망쳤다. 부녀자 들은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남자들은 큰 아이를 끌고 걸음을 재촉해서 산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그들은 피난처를 구하기 전에 총에 맞아 주고 무기로 맞아 중상을 입었으며, 일부는 체포되어 감옥으로 끌려 갔다. 라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제암리 사건 매티 노블 기록 (1919년) 에서는, 수원 지역 구호 활동에 대한 기록 구호 물자 분배 위원회는 W.A. 노블, 프레이 양孃 , 마커 양, 코윈 테일러 씨로 구성되었다. 활동 지역은 수원역에서 정서 正西 방향으로 21 마일(약 34 킬로미 터) 에 위치한 사강리와 인근 마을, 제암·수촌·화수리 마을의 소규모 동리와 그 사이에 흩어져 있는 농가들이다. 이들 마을은 전체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소실되었다. 마을간의 최장 거리가 20 마일(약 32 킬로미터)에 이르고 어떤 마 을들은 좁은 계곡이나 급경사진 언덕과 같은 자연적인 경계선으로 갈라져 한 쪽에서 다른 쪽의 마을이 완벽하게 가려져 있기 때문에, 이들 마을에 불을 지 른 군인들은 먼 거리를 돌아 다녀야 했을 뿐 아니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특히 흩어져 있는 농가에 방화 할 때 그러했다. 화수리 마을에서는 시골 부자의 큰 집이 불탔다. 그 집은 37 칸(1 칸은 사방 8 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