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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한권으로 읽는 경기도의 3·1운동 인명 나이 주소 종교 학력 비고 車炳赫 32 537 무 차병한과 8촌 車炳億 24 차병혁의동생 포목상 嚴聖九 39 석포리 소사 행동대장 차희식과 그의 그룹 만세운동에 주곡리에 살고 있는 차희식도 행동대로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교육도 못 받고, 종교도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신문 잡지 등을 읽을 수 없 었다. 1915년 수원경찰서에서 도박죄로 태형 60의 처분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러 나 그 후 경성복심법원에서 원 판결을 취소하고 징역 3개월을 받고, 그 집행을 마쳤다. 그 후 그는 1918년 端川순사가 부임한 이래 도박을 하지 말라는 권유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항상 감시의 주된 대상이 되었던 것 같다. 그러던 와중에 서 울에서 만세운동이 있던 수일 뒤 같은 마을에 살고 있는 유서방으로부터 만세운 동에 대한 소식을 들었던 것이다. 특히 그는 성격이 활발하고 교재력도 있었으 며 힘도 장사였다고 한다. 당시 구슬리에 살았다. 처가가 양영대군파 전주이씨 로서 구술에 주로 거주하였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차병혁, 차병한 등과는 일가 였으며, 차희식이 한 항렬 높다고 한다. 26) 차희식은 동지인 장제덕(장순년), 장소진 (장봉래) , 김흥식(김치덕) 등과 함께 행 동대로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김흥삼은 신문조서에서, 화수리항쟁과 관련 하여 군중을 지휘 선동한 사람이 석포리의 김치덕, 장봉래, 장순명, 차희식 등이 라고 증언하고 있다. 또한 김덕삼도 우정면사무소의 파괴 전소에 대하여, 26) 차희식의 손자 차창규와의 면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