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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한권으로 읽는 경기도의 3·1운동 그 가운데에서도 경기지방의 운동이 광범하고도 격렬하게 전개된 것은 농 민들의 적극적인 참여 때문이었다. 운동이 절정에 달한 3월 하순에서 4월 초순 사이에 경기 지역 피被 기소자의 90%가 농민이었던 것은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농민들은 주로 리 단위의 조직에 의해 평화적 만세시위, 횃불봉화시위, 폭력투 쟁 등 스스로의 다양한 투쟁방법을 구사하며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농 민들의 투쟁양상은 주로 만세시위로 시작되었지만 일단 세가 모여지고 투쟁의 열기가 고양되면 면사무소, 군청, 경찰관서 등을 공격하는 폭력투쟁으로 전화하 였다. 그러나 농민들의 폭력투쟁은 본질적으로 일제의 무단통치하에서 충분히 그 계기가 성숙되어 있었다. 따라서 운동의 초기 단계부터 일제 지배에 직접 저 항하는 폭력투쟁의 양상이 33.8%나 나타나고 있었고, 3, 4월 전 기간에 걸쳐 전 체 투쟁의 30%이상이 폭력투쟁이었던 것은 이 지방의 운동이 일제에 대한 직접 투쟁을 지향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경기지방의 3·1운동은 외견상으로는 당초 민족대표들이 의도했던 독립선 언식과 만세시위의 형식으로 촉발되었으며 실제로 운동에 참여한 민중들은 독 립청원 방식이 아닌 주체적인 시위운동을 독립 획득의 방법으로 구상하고 있었 다. 대다수의 민중들은 ‘민족의 자존’ ‘독립’을 선언한 민족대표의 독립선언 자체 에 크게 고무·선동되었으나 그것의 의미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는 없었고, 즉각 적인 ‘독립’에 매몰되어 있었다. 따라서 독립 후 지향하는 사회상에 대한 정치사 상적 이해도 희박하여 민주공화제 등에 대한 이해보다는 왕조의식을 미未 탈피 한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민중들의 의식은 비록 명확한 정치사상적 지향 을 갖지는 못했으나 생활상의 불만에 기초한 변혁의지를 가지고 민족모순과 계 급모순의 해결을 지향하고 있었다. 토지분배, 식민지 무단농정의 철폐, 부역, 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