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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부 경기도 지역 3·1운동의 전개 143 롱을 하여 주민들과 이따금 시비가 벌어졌다. 또한 일본인 감독들은 너무나 과 중하게 인부들에게 노동을 강요하여 인부들은 늘 불평불만 속에서 살아가고 있 었다. 따라서 이곳 주민들과 인부들은 적극적으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던 것이 다. 화수리 주재소를 불태운 혐의로 징역 15년을 언도 받은 이영쇠 역시 외지인 이었다. 수촌리의 차인범은 이봉구의 말을 빌어, “석포리의 노동자가 몽둥이로 순사를 타살”했다고 언급하고 있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그리고 장 안면장 김현묵도 그의 조서에서, 노동자풍의 20명 쯤이 (우정)면장의 집으로 몰려가서 찾는 모양이었는데 없다 고 하면서 돌아왔다. 고 한데서 노동자들의 참여를 살펴볼 수 있다. 한편 장안리에도 방축공사가 있었다. 오경환은 4월 3일 장안리의 이주상의 방축공사 감독으로 일하고 있었다. 또한 우정면 멱우리의 경우도 방축공사장이 있었다. 멱우리에 살고 있던 송영만의 경우도 4월 3일 아침부터 아들과 머슴을 데리고 방축공사장의 수문을 수리하러 갔다고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장안면 장안리 구장 김준식은 진위군 포승면 홍원리의 佐坂의 공장에 가서 일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좌판의 방축공사장이라고 짐작된다. 이곳 좌 판의 공사장의 경우 좌판의 동생 佐坂才吉이 일본인 감독과 조선인 감독 박동 현, 홍사문, 김익삼등을 이끌고 다니면서 장안리, 홍원리 주위의 동리들을 돌아 다니며 횡포가 심하였다. 특히 홍원리에서 일하고 있는 일본인 감독들은 홍원리 에 술집이 없어 술 생각만 나면 배를 타고 이따금 장안리로 나와 술을 마시고 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