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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부 경기도 지역 3·1운동의 전개 141 대에는 경지확장, 염전개발 등으로 점차 규모가 커진 것 같다. 당시 장안면 석포리지역에는 수로를 만들고 개간사업을 하기 위하여 서울 에서 石倉玉吉(憲一), 永野藤藏라는 일본인들이 와 있었다. 그들은 秋山開墾공장 에서 일하고 있었으며, 석창은 경성부 元町 二丁目 61번지에 살고 있었으며, 청 부업자이고, 당시 34세였다. 그는 1918년 5월부터 석포리에 와 있으면서 간사 지 공사를 감독하고 한 달에 2, 3회쯤 용달을 위하여 서울에 다녀오곤 하였다. 1918년 3월부터 석포리에서 간사지 경영사업을 하고 있었다. 영야는 석포 리 차병혁의 아버지 車尙文집에 1916년경부터 임시사무소로 빌려 출입하고 있 었다. 그러므로 영야는 차병혁과는 친숙하게 지내는 사이었다. 당시 개간 사업에는 경성에서 불러온 인부 29명과 현지에서 조달된 인부 등으로 작업을 하고 있었다. 당시 서울에서 온 인부로 1918년부터 4월 3일 당 일까지 일하고 있는 인물로는 신주백, 박운성, 이순학, 최도일, 이경식, 이순식, 최성천, 이용구, 김봉수, 김영식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4월 3일 이전에 해고된 사람은 신영수, 이희준, 김학준, 조순만, 김봉성, 홍억원, 박춘일, 강숙영, 장편문, 이성규, 장춘명, 정원득, 이흥원, 서일성, 임순식. 김흥원, 송대정, 박준영 등이다. 경성에서 온 인부는 총 29명인데 그중 일부는 다른 곳으로 간 사람도 있고 만세 당일에는 12-3명이었다. 그들은 시위 전에 만세시위가 있을 것이라는 소문 을 듣고 있었다. 또한 4월 2일경부터 주민이 많이 발안 장터쪽에서 몰려 올 것이 라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래서 영야는 술을 마시려면 사다가 마시라고 했 고, 일체 마을 사람들과 교제하지 말도록 지시하고 있었다. 신주백은 석창 간사지공장에서 인부감독으로 1918년 3월부터 일하고 있 다. 한편 이들 인부들 가운데에는 마을 사람들도 있었다. 문춘실이 그 예이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