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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부 경기도 지역 3·1운동의 전개 139 년 2월 8일자에 따르면, 수원경찰서관내에 수원면 매산리, 향남면 발안리, 태장 면 병점리, 양감면 료당리, 음덕면 남양리, 우정면 화수리, 송산면 사강리, 매송 면 천천리, 성호면 오산리, 반월면 팔곡1리, 의왕면 고천리 등에 매산리, 발안, 병 점, 요당, 남양, 화수, 사강, 천천, 오산, 반월, 고천 순사주재소가 설치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당시 발안장 주재소에는 조선총독부 순사 井上龜雄이 근무하고 있었다. 그 는 평민으로서 연령은 1919년 당시 41세였다. 제암리 및 고주리 학살사건과 관 련하여 가장 주목을 받는 인물은 순사보 조희창이다. 그는 제암리 322번지에 거 주했던 인물이다. 제적등본에 따르면, 1914년 4월 7일 경기도 파주군 칠정면 문 산 상동에서 이주하였고, 1917년 3월 26일 수원군 성호면 도산리로부터 제암리 로 이주하였다. 1919년 4월 제암리 고주리참변 이후 동년 6월 경기도 고양군 용 강면 염리로 이사하였다. 풍양 조씨로 부친은 조영년, 어머니는 유씨, 부인은 오 봉근이고, 슬하에 1남 1녀, 조옥희, 조성재를 두었다. 화수리주재소에는 일본순사 1명, 조선 순사보 3명이 있었다. 주임순사 川 端豊太郎의 본적은 鹿兒島縣 薩摩郡 下甁村 手內였으며, 당년 25세였다. 그리 고 순사보 오인영은 본적은 경기도 진위군 서면 송화리일칠오번지였고, 출생지 는 충청남도 아산군 배방면 장재리이며, 사립평택보통학교 2년을 수료하였다. 1919년 당시 25세였다. 그는 1913년 3월 19일 순사보가 되었으며, 그 이전에는 토지조사국의 필생, 또는 면의 고원으로 일하였다. 오인영은 1917년 12월 17일 부터 화수리 주재소에 부임하였다. 순사보 박재옥, 이상룡과는 동숙하며 지내 고 있었다. 순사보 박재옥은 본적 및 출생지가 경기도 수원군 음덕면 송림리 487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