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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한권으로 읽는 경기도의 3·1운동 <표2-2-2>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사강 만세운동은 연령적으로 10대부터 50 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참여하였다. 그리고 그 가운데 중심인물은 홍면옥, 홍준 옥 등 30대가 중심이었다. 특히 홍면옥 19) , 홍효선 20) 그리고 홍면옥의 장인인 김명 제가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 면서기인 홍면옥의 동생 홍준옥과 문상익 역 시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당시 30대는 홍면옥, 임팔용, 홍준옥, 차경현, 김교 창, 김도정, 홍문선, 홍문선, 김용준, 안순원, 정군필 등이었다. 10대는 홍면선, 홍 복룡, 20대는 문상익, 홍승한 (홍효선의 장남임), 박춘흥, 황칠성, 홍관후, 전도선 등 이다. 40대는 왕광연, 홍남후, 민용운, 이경집, 오광득, 이윤식 등이다. 50대는 김 명제, 김성실, 최춘보, 홍태근 등이다. 둘째, 직업을 보면 대체로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 외에 일부가 면서기 (홍준옥, 문상익), 음식업(차경현), 이발업(김교창), 고기전 (황 칠성) , 잡화상(전도선), 포목상(정군필) 등에 종사하고 있다. 문상익은 어려서부터 한문을 배우고 1911년 8월부터 경성토지조사국의 기사가 되고, 1916년 11월까 지 동 국에 근무하고 있었다. 1917년 7월에 송산면 서기로 임명되었다. 홍종옥 은 어려서부터 사강리에서 한문을 배우고, 1911년 11월 14일 경기헌병대 보조 원이 되었다. 1914년 3월 30일에 만기되어 1916년 2월경 파주군 임진면 서기가 되었다. 그리고 1918년 1월 30일 의원 면직되어 동년 2월 4일 수원군 송산면 서 기가 되었다. 19) 제적 등본에 따르면 홍면옥의 아버지는 홍태원이고, 홍준옥의 아버지는 홍태정이다. 홍면옥의 아들 홍진후에 따르 면 홍준옥은 양자를 갔다고 한다. 20) 홍효선은 1919년 3월 28일 체포되어 수원수비대에서 모진 고문 끝에 순국하여(홍효선의 3남 홍승천<1913년생>이 1973년 5월 증 언) 시신조차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당시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박영호가 1977년 2월에 증언) 그러나 홍효선의 아들 홍성환의 당시 증언에 따르면 부친은 부천군 육부면에 피신하였다가 4월 5일 집에 들러 1박하고 서신면 장외리 정태환의 집으 로 간다고 하였다 한다 (21권, 249) . 앞으로 좀더 검토의 여지가 있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