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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한권으로 읽는 경기도의 3·1운동 3월 26일(음력 2월 25일) 오전 9시경 사강리 구장 홍명선의 집으로 호세를 납부하 려고 모인 사람이 140명 정도 되었다. 이때 홍효선은 주민들에게 다른 마을에서 도 만세를 부르고 있으니 우리도 만세를 부르자고 외쳤다. 10) 그러자 일동이 이에 동의하였다. 이때 홍면옥은 여러 사람들에 대하여 시위운동을 전개하는 것은 좋 은데, 만약 일경에게 붙잡혔을 때에는 누가 주모자라는 것은 말하지 말아야 한 다고 주민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는 과거 경찰에 체포되어 신문을 받은 경험 이 있기 때문에 이처럼 치밀한 계획을 추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홍면옥, 홍효선 등의 주도로 주민들은 송산면사무소 11) 로 향하였다 그 곳은 바로 일본의 최하단 말단 행정기구였기 때문이었다. 주민들은 오후 5시경 사강리 송산면 사무소 부근에 구한국국기를 게양하고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 였다. 이때 왕광연, 홍명선, 홍봉근, 홍복룡, 홍준옥, 김교창, 김도정, 김용준, 차경 현, 진수익, 이순일, 이윤식, 이윤식, 최추보, 안순원, 오광득, 정군필, 김병준, 김성 실, 임팔용 등과 150여명의 군중이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놀라 순 사보 2명이 와서 주모자가 누구냐고 다구치자 홍효선은 자신이 주모자라고 밝 히는 대담성을 보여주고 있다. 만세시위가 끝나자 일본 경찰이 중심인물인 홍면옥과 홍효선 등을 체포하 려하자 그들은 서신 방향 마을 앞 육일리 뒷산인 궁평산 (현재 구봉산)에 가서 숨 어 있었다. 사강주재소12)의 경우 숫적 열세로 일단 주민들을 무마시키기에 급 급하였다. 10) 이러한 주장은 자못 만세운동이 피동적인 것처럼 보인다. 재판 및 신문과정에서 형량을 줄이기 위하여 언급한 대목 으로 사료된다. 11) 현재 위치는 송산초등학교 우측 옆에 있는 공영주차장 자리이다. 12) 사강주재소는 1917년 2월 8일에 설치되었다. (『조선총독부관보』 1917년 2월 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