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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할에 따라 여러 형태의 투쟁방식을 전개해 나갔다는 점에 있다. 이들의 운동은 통일적인 지도세력없이 고립 분산적으로전개되었지만, 지역 단위의 가능한수준에서 운동의 조직화 가모색되었다. 시위를 주도한 지방사회의 지식인 · 청년 · 유생 출신들은 가능한 범위 내에서 시위주도집 단을 조직하고 선언서 · 태극기 · 독립만세기 · 격문 · 경고문 등을 제작 배포하였다. 민족대 표가 작성한 독립선언서의 직접적인 배포망이 마약했던 경기도였지만, 3월 말부터 동시 다 발적이고 격렬하게 전개된 투쟁은 농민 중심의 운동이었다. 면 · 리 단위로 전개된 농민의 시위운동은 그 규모나 투쟁 양상에 있어서 가장 발전된 양상을 보여주었다. 적게는 수백 명 에서 많게는 수천 명이 단일 시위운동에 참여하였으며, 그러한 대규모 농민이 참여하는 시 위의 횟수도증가하였다. 농민들은 스스로의 투쟁방법을 가지고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 를 외치는 평화적 시위, 그리고 돌과 몽둥이 등으로 무장하고 관공서를 파괴하는 무력투쟁 등 다양한 투쟁 모습을 보여주었다. 횡t촌사회의 만세시위운동은 장날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 았는데, 이때는사전 연락을통해 군중들을모이게 하고주동자가군중 앞에 나서서 연설을 하고 태극기나 독립만세기 · 선언서 · 격문 등을 살포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시위 하다피검X까생기면 경찰관서에 가서 석방을요구하는과정에서,또는 일제의 무력탄압으 로 사상2까 발생할 때면 이에 대항하는 무력시위로 전환하였다. 군중들은 면사무소 · 군 청 · 우면소 등 비교적 방어력이 약한 곳을 파괴하고 관리를 구타하는 등 기션을 잡아 사기 를 높인 다음, 경찰관서나 헌병주재소 등을 공격하여 체포된 동지를 탈환하였다. 독립운동 의 궁극적인 목표가 일제를 축출하고 독립을 쟁취하는 것이었으므로 일제의 말단 통치기구 인 면사무소 · 군청 · 경찰관서가 공격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하였다. 농민들은 “일제의 앞잡이인 면사무소 · 주재소 · 우편소 등을 모두 때려부쉬야 한다. 그리고 일본인도 모두 쫓 아버려야한다”는생각이 보면적으로확산되어 있었다. 이런의식을가진농민들의무력투쟁은처음에는방어적인차원에서시작되었지만투쟁이 가열될수록 공격적인 싸움으로 발전해갔다. 얀산과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는 수원군 장안 면 · 우정면의 경우와 같이 처음부터 면사무소나 주재소를 공격하기로 사전에 계획된 공세 적인 폭력시위도 나타났다. 이들은 주재소를 습격할 때에 일본 군병의 발포에 대비하여 둥 근 진형을 만들어 사면에서 포위해 들어가는 방식을 취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적극적인 투 쟁의 결과 안산을 포함한 경기도지역에서는 경찰관서 17개소, 주재소 12개소, 군청 · 연사 무소 35개소, 우편소 2개소 등이 파괴되었다. 그러나 얀산지역민들은 시위가 고조될 때 마 다주민들을설득하여 비폭력을유도하여 커다란유혈충돌은발생하지 않았다. 또한 안산지역민들이 보여준치열한투쟁은식민지 무단통치하에 펼쳐진 생활상의 가혹한 40 I 얻구조시보고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