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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군인 7명이 무장하고 이를 막기 위하여 파견되어 있었다.없)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군자 면사무소(현 군자초등학교 옆) 앞에서 원곡리(元各里)에 사는 강은식(姜股植)이 수백 명의 군중 속으로 들어가 태극기를 휘두르며 주민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격렬한 기세로 주민들이 달려들자 일본경찰은 총을 쏘아 이를 해산시키려하였다.65) 그러나 일부는 흩어졌 으나 시위는 계속되었다. 같은 때 죽률리(竹票里)에 사는 김천복(金千福)도 동리 사람들을 설득하여 이장집에 모아게 한다음 ‘조선독렵 만세를외치기 위하여 위의 거모리에 있는연 사무소 부근에 집합하라’고 권한 다음 이민(里民) 수 십 명을 모아서 거모리로 힘t하였다. 도 중 총소리가 나자 일부 주민이 흩어지기는 하였지만 김천복과 몇몇 사람들은 길을 우회하여 만세시위에 합세하였으며,%) 면사무소 및 주재소 부근에 집합한 수 백 명의 군중에 함께 조 선독럽만세를외쳤다. 선부리(仙府里)에서도 3월 31일 다수의 군중이 모여 면사무소와주재소를습격하며 만세 시위를 벌였으며 장현리 (長뼈里)의 서당 생도 권희 (權l喜)와 장곡리의 농민 장수산(張壽山) 등은 4월 6일 권희의 집에서 「비밀 통고」라는 제목 아래 또한 ‘조선이 일본에 합병된 이래로 받은 10년간의 학정에서 벗어나독립하려 한다. 우리들은 이 기쁨에 대하여 4월 7일 군자면 구(舊) 시장에서 조선독립 만세를 같이 부르려고 한다. 각 이민은 태극기 1개씩을 휴대하고 서 와서 모이라’ ‘조선이 일본에 합병된 이래로 받은 10년 간의 학정 (盧政)에서 벗어나자’ 라 고 격문을 작성하였다. 그리고 이 격문을 각 동리에서 차례로 회람할 수 있도록 그럼£로 표 시한 뒤 이를 동리 구장의 조카 이종영(李鍾榮)의 집 앞에 놓아두어 많은 사람이 회람하도 록 하였다. 또한 징L곡리 구장 이덕증(李德增)은 이를 회람한 뒤 월꽂리 (月 申里) 구장에게 전 달하였다. 이종진( 李鍾 振)은 재판과정에서 ‘4월 5일 오후 3시 경 밭에서 돌아오는 도중 군자리 (君子 里)에 개}운장곡리 남쪽고개 길가에 봉투속에 1통의 문서와작은돌아 봉하지 않은대로 들어 있었다.자기는글자를모르므로이종형(李鍾亨)이란자에게 읽어 달랬더니 “4월 7일 만세를 부르니 면사무소에 집합하라”는 사발통문(沙錄通文)이라고 하며 그는 이것을 장곡 리 이장 이덕증(李德增)에게 전해주었다고 하였으며, 이덕증은 4월 5일 오후 6시 경 이민 (里民) 이응수(李應洙)가 이종형으로부터 “구장에게 교부하라”고 하였다 하며 「비밀통고문 (秘密通告文)」 1통을 자기에게 주므로 이것을 받아 가지고 읽어 보니까 “오는 7일 대한독립 만세를 높아 부를터아니 구 시장 자리에 면민은 집합하라. 모여 오지 않는 자는 후일 위해 (危害)가 있을 것이다”는 취지가 기재되어 있어서 자기는 후환이 두려워 곧 그 문서를 지정 64) 「뺨Aα없擾|;|뿔τ~f4°」 密第102뭉其160 (日本國立公文書짧所熾文뿔) 65) 「때立週폐ι圍1「&件」 i꾀第10371융 (第39햄) (日本國立公文펌댄所減文뿔) 66) 국가보훈처, 『독립운동사자료집』 제5권 1971, 283∼287쪽 36 l 연구조사보고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