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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로, 그리고 읍 · 면 · 리와 산간 벽지로 파급 되었다. 그리고 각지의 운동은 일회에 그치 는 것이 아니고 계속 반복되었으며 지방의 대부분은 장날을 기하여 발생하여 5일∼10일 간 격으로 되풀이 되었다. 또 참가 계층을 보면 3 · 1운동의 주도체는 예외는 있으나 주로 천도 교와 기독교가 주체가 되었으며 이에 농민들이 가담함으로써 순식간에 전민족운동으로 파 급되었다. 또 3· 1운동의 션도적 역할을 한 학생들은 전국 어디에서나 공통적으로 핵심 역 할을하였다. 경기도의 3· 1운동은 발원지인 서울과 인접한 관계로 서울로부터 가까운 곳에서 먼 곳으 로 파급 되었다. 또 경기도의 3· 1운동은 다른 지방과는 달리 처읍부터 약 2개월 동안 끊이 지 않고끈기 있게운동이 전개되었으며 전국어느도보다격렬했고많은희생자를냈다.특 히 향남(수원) · 안성 · 이천 · 양평의 시위는두드러졌다. 경기도의 3· 1운동은 일률적인 것은 아니나 주로 서울로부터 가까운 곳에서 먼 곳으로 파 급되 었다. 3월 1일 개성의 한영서원(韓英書院) 학생과 기독교 목사가 계획하여 3일부터 7일 까지 근 일주일간 대대적인 시위가 전개되었고, 수원에서도 3월 1일 용두각에서 얼어난 시 위를 시작으로 계속 만세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경기도내에서 3월 상순에 얼어난 지역을 들면 3월 3일 고양군 동막에서, 3월 5일∼6일에는 강화군 부내에서, 3월 7일에는 인천에서 일어 났으며 , 3월 9일에는 고양군 한지면에서, 10일에는 양평군 문호와 파주군 교하에서 독 립만세시위가 일어났다. 3월 중순 이후에 들어서자 시위 지역이 차츰 전 도내로 파급되었 다. 평택 · 얀성 · 파주 교하, 양주 와부, 가평 북면 등의 시위를 시작으로 효}순에 이르러서는 고양·시흥·안산 · 광주·양주 · 부천·김포 · 수원·용인 · 안성·이천 · 양명·가평 · 포 천으로 확산되었으며 4월에는 진위 · 여주 · 연천 · 장단으로 파급됨으로써 도내 20여 개 군 중시위가일어나지 않는곳이 없었다. 경기도의 3· 1운동은 군청 소재지 이상의 도시에서는 학생과 기독교인이 중심적 역할을 하였고 일부 지역은 천도교인이 주도하였다. 그러나 얀산지역에서는 향촌유교지식인과 농 민들이 주도적 역할을하였다. 처음에는 평화적인 만세시위로 전개된 경기 지방의 3 · 1독립운동은 3월 히순에 들어서면 서 점차 무력시위로 변해 갔다. 평화적으로 진행된 시위가 과격화된 이유는 일제 군경의 무 자비한 진압방식으로 시위대의 감정이 격화되었으며 시위군중의 무차별 체포 · 투옥은 시 위대를 흥분시켰다. 군중들이 체포된 사람의 석방을 요구하며 일제 통치기관에서 시위 중 일제의 무기 사용으로 사상자가 발생하자시위의 양상이 무력시위로 전환되었다. 더욱이 시 위군중에 대한 일본 군경의 발포는 군중을 극도로 자극하여 경찰서 뿐만 아니라 면사무소, 우편소 등 일제 식민통치기관을 습격 · 파괴 · 방화하였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군중이 일제 의 군경에 의하여 희생 당하였다. | 안산지억의 독립끝동 I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