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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생간의 이같은 활동은 일본 경찰에 탐문되어 윤창석이 피체되었다. 이에 조선독럽청 년단은 2월 8일 10시에 독립선언서 등 인쇄물을 각요로에 우송하고오후 2시에 동경 조선 기독교청년회관에서 학우회 임원 선거 명목으로 유학생대회를 개최한 가운데 실행위원 11 명이 서명한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낭독하였다. 400여 회중은 만세의 환호성을 터뜨렸으 며 감격에 못이겨 통곡하는 사람도 있었다, 선언식을 마칠 무렵 일본 경찰대의 급습으로 대 회장은 큰 수라장이 되었고 10명의 유학생이 피검 투옥되었으며, 그중 송계백은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재일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은 이 뒤에도 일비곡공원 등에서 계속되었다. 한국 유학생들이 일본의 수도 한복판에서 대한의 독럽을 선언하고 독립만세를 외쳤다는 것은 한국민족의 국권회복의지를 잘 표현한 것으로서 한국 근대민족운동사에서 적지 않은 의의를 갖는다. 특히 3· 1운동을 선도하였다는 데에 더 큰 의의가 있다. 그런데 2· 8독립선 언은 유학생들이 독자적으로 행하였다기 보다는 국내외의 민족지도자들과의 갚은 연락 속 에서 국내의 큰 독립운동을 위한 전초전으로서 터뜨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2· 8독립선 언 후 유학생들은 학엽을 중단하고 국내로 들어와 자신의 연고지 등을 찾아 3· 1거사의 사 전 교섭과 계획을 하였다. 김마리아 · 황에스터 · 차경신 등 여자 유학생들도 국내에 들어와 여학교 · 교회 · 병원 등을 찾아 독립운동에 참여하도록 권유하였다. 김마리아가 서울에서 자기와 별로 관련이 없었던 천도교계의 지도급 인사인 이종일 등을 만났던 것을 보면 동경 출발전에 천도교계와의 접촉이 사전에 계획되었던 것으로보인다. 3· 1운동의 국내 계획은 1918년 말부터 행하여졌다. 독렵선언서에 서명한 33언을 포함한 48인이 준비단계의 지도자들이었다. 이들은 기독교 · 천도교 · 불교계의 지도급 인사들 및 학생단 대표였다. 종교계와 학생층이 민족적 거사 추진의 주도 세력이 되었는데 이는 유교 사회 지도자의 후퇴로신지식인층이 한국근대사의 주역으로등장하였음을말하여 준다. 이들 지도층이 처음에는 서로 연계없이 각기 민족적 거사를 계획 추진하고 있다가 그 뜻이 하나임을서로 알게 되어 곧통합된 민족지도력을 이루게 되었다. 이로볼때 3·1운동은 2 천만 민족의 마음이 하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또 한민족의 자주독립은 거역할 수 없는 역사적조류요소명이었음을증명해준다. 저12절 3· 1운동의 확산 서울에서 봉기한 3·1운동이 전국각지방으로확산되는과정을살펴 보면 3월 1일 당일에 는 전국 주요도시에서 일제히 봉기 하였으며 그 후에는 철도 연션을 따라 대도시에서 중소 28 | 연구조사보고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