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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의 참여도와 의미를 감안했을 때 다른 지역의 기념탑의 규모 와 형식면에서 초라하다는 판단에 따라 1982년에 지금의 기념탑을 새롭게 건럽하였다. 기존의 기념탑은 순국기념관 입구로 이전하여 세워져있다. I 기념탑에 새겨진 내용】 3 ·1운동순국기념탑 호}성제암기념탑 (구) 기미년 삼월일일 일본의 말굽아래 십년간 잠들었던 민족의 분노는 활화산 터지듯 일어나 삼일독립운동이 선언되자 노도같은 백의민족의 자유를 부르짓는 백수 항전의 드높은 함성 은 삼천리 방뺨주곡에 만길 불꽃을 올렸다. 죽음 아니면 자유를 달라며 서리 같은 총칼을 든 일본헌병 앞에 대한독립만세를 높이 불렀다. 이라 같은 일본 헌병은 칼과 총으로 백의민족 을난 도질 쳤다. 경기도 화성은 역사깊은문화의 도시였다. 여기에 향남면 제암리 두령바위 농가 사십호는 가난했으나 정신문명의 수준이 높았다. 동리 안에는 기독교 예배당이 있고, 뜻있는 청년들은 예배당 안에서 나라 찾을 것을 항상 기도드렸다. 삼일운동이 터지자 그들 은 봉화를 높이 들고 독립운동을 일으킬 만반의 태세를 취했다. 독수리 같은 일경은 이들의 행동을 노렸다. 마침내 음력 삼월십육일 오후 한시경 일경들은 돌연 부락을 습격하여 청년 이십일명과 여인 이영 도합 이십삼명을 무기로 위협하여 예배당에 감금하고 출입문을 폐쇄 한 뒤 석유를 뿌려 불을 질렀다. 불길은 두령바위를 사를 듯 하늘에 뻗쳤고, 순국열사의 기 막힌 통곡성은 아득히 구천으로 사라진 채 예배당은 한줌의 재로 변해 버렸다. 이어 일경은 다시 고주리로 가서 주모인사로 지목된 천도교인 육명을 결박하여 나무더미 에 세워 총살하고 불을 질렀다. 만고에 없는 일경의 잔인무도한 행동이었다. 스물아홉분의 순국열사는 이렇게 푸른 죄를 불속에 뿌려 겨레의 넋을 지켰다. 오늘 자주독럽 국가를 찾은 두령바위 사람들은 순국열사의 명복을 벌면서 후세에 영원히 이 사실을전하려 당시 피화처였던 예배당터에 정성을모아아담한기념탑을세운다. 전면은대통령 이승만박사쓰시다. 윌탄 박종화 짓고, 여초 김응현 쓰다. | 독립만세훈흉 기넘비건립 1 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