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층의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하게 참여하였으며, 그중의 하나가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애국심 을 고취하고 인재를 양성하고자 한 교육계몽운동이었다. 교육계몽운동은 당시“교육과 식산 (植훨)으로 실력을 양성한다”는 자강운동의 취지와 맞물리면서 전국적으로 크게 확산되었 다. 당시 지식인,관료층은국권상실에 대하여 문화계몽운동을통하여 ‘국권회복’을달성하려 고 하였다. 이 운동의 주체는 갑신정변, 갑오개혁, 그리고 독립협회운동을 통하여 ‘개화파’ 로불리던문명개화론자들이었다.그들은 일본의 명치유신(明治維新)을모델로하여 구래의 지배층이었던 지주층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화, 입헌적 정치체제를 달성하여 부국강병(富 國彈兵)을꾀하고자하였으며, 이러한과정을 ‘문명개화(文明開化)’라고생각하였다. 따라 서 그들은 민중층의 항쟁이나 변혁의 요구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부정적이었고, 오직 그들의 주도권이보장되는범위에서개량적인형태를취하기도하였다. 그들은 국권상실이 열강에 비해 ‘실력이 부족’ 했기 때문에 얼어난 것으로 판단하여, 실력 을 양성하는것이 곧국권을회복하는 첩경이라고생각하였다. 이때의 문명개화운동은 민중 계몽을 통한 설력양성을 일차적인 과제로 설정하고, 신문, 잡지 등의 언론활동과 학교설립 을 통한교육활동 등을 주로 하던 문화운동의 형태를 취하였다. 통감부는 한국의 식민지 지배를 준비하면서 그 일환으로 식민지 교육의 기반을 구축할 교 육정책을 구체화하였다. 따라서 통감부의 교육정책은 한국의 민족교육을 억제하고 일제의 침략에 대한 한국인의 저횡L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추진되었다. 이를 위해 1906년 8월 27 일‘칙령 제44호보통학교령’을시작으로 8윌 31일 칙령 제41호 「사범학교령」, 제43호 「외 국어학교령」, 칙령 제42호 「고등학교령」 등 새로운 교육령을 반포하여 종래의 교육관제 및 규칙을 폐지하고, 각급 학교의 학제를 개편하였다.7) 같은해 9월 1일에는 ‘교과용도서 검정 규정’과 9월 17일 「학부편찬교과용도서규정」을 공포하는 한편, 학교 설립에 적극적인 학회 활동을 규제하기 위한 「학회령」을 9월 1일자로 발표하여 학회셜럽도 통감부의 인가를 받도 록 하였다_s> 그러나 일제의 교육통제정책에도 불구하고 교육만이 민족의 각성과 단결을 도 모하여국권을회복할수있는방법이라고판단한각계각층의사회세력에의해사립학교설 렵은 계속 확대되었다. 『황성신문』이나 『대한매일신보』등 민족 신문들도 학교 설럽의 펼요 성을 강조하면서, 지방 유지들로 하여금 학교 셜럽의 주체로 나설 것을 촉구하였다. 특히 1906년 3월 26일에 ‘광학조칙(廣學짧物)’이 반포되자 각지방에서는군수가봉칙(奉勳)의 의미로 학교 설립에 앞장서기도 하고, 지방 유지들이 중심이 되어 학교를 설립하기도 하였 7) 『관보..! 1906년 8월 31일, 9월 l일. 8) 『관보..u 1908년 8월 31일, 9월 l일, 17일. | 안얀지억의 독립끊풍 I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