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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식 목사 / Rev. Kim, Seong-Sik(1890.11.24~1950.7.10) 1910년 한일 합방과 을사늑약으로 나라와 주권을 빼앗기고 일제의 억압으로 신앙은 물론 인간으로서 자유와 삶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당시 농민들의 생활상은 처참하기 짝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무지와 문맹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청명산 기슭 끝자락 마도면 고모리 석발동 510번지에 믿음과 복음의 정초를 세웠다. 고모교회 초대 김성식 목사는 1890년 11월 24일 평안남도 용강군 김난주씨의 4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하셨고, 배재학당, 연희전문, 협성신학교에서 수학하셧으며 1917년 강원도 강릉 명성국의 딸 명대륜과 결혼하여 7남매를 낳았다. (그 중 두 아들 김동형, 김동걸은 감리교 목사로 은퇴하였고, 두 사위 중 김윤실은 장로교 목사로 한국 전쟁시에 순교하였고 유태종은 장로교 목사로 은퇴하였음) 1919년 중부연회 남양서 구역 사강교회를 순회 시무하고, 1920년 현 서울연희 창천구역 본처 사역자로 파송 받아 시무하다가 1932년 하얼빈에서 해외선교를 하기도 하였다. 1948년 6월 28일 고모교회 초대목사로 파송 받아 시무하면서 마도공민학교, 서민공민학교 교육의 기반 조성에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농촌 계몽의 선구자로서 활동하였다. 당시 김영재 권사의 가정 사랑방을 제공받아 사역에 전념하였다. 1950년 6.25전쟁으로 나라가 혼란 속에 있던 중 공산당원들이 김성식 목사를 잡아가기 위해 찾아다닐 때에 이 소식을 듣고 혹여 성도들이 고초를 당할까 마음 아파하던 중 온 가족이 부산 피난길에 오르려고 할 때, 자녀들의 눈물 어린 만류를 뿌리치고 김성식 목사 스스로 마도인민회당을 찾아가 투옥되었다. 옥고를 치르시는 동안 김오례 권사의 딸 재옥(당13세)이 옥바라지를 위해 보리밥을 지어 아침 저녁으로 보름동안 먼 길을 오가며 식사를 제공하던 중 1950년 7월 10일 김성식 목사가 보이지 않아 물어보니 "너의 목사는 총살 당했다"는 순교의 소식을 듣고 재옥은 보리밥덩이를 땅에 떨어뜨리고 통곡하다 돌아온 것이 그의 마지막 소식이었다. 그동안 고모교회 성도는 예수님이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성도를 사랑하여 스스로 순교를 택한 김성식 목사의 신앙은 절개를 숭모해왔다. 이에 2018년 5월 27일 창립 82주년 예배에서 고묘교회 성도와 출향 성도들이 한마음이 되어 김성식 목사의 숭고한 신앙과 순교정신을 기리고 후손에게 물려주기 위해 순교비를 세우기로 결의하고 2019년 5월 28일 창립 83주년을 맞으면서 이곳에 순교비를 세우게 되었다. - 2019년 5월 26일 고모교회 성도 일동것처럼 성도를 사랑하여 스스로 순교를 택한 김성식 목사의 신앙은 절개를 숭모해왔다. 이에 2018년 5월 27일 창립 82주년 예배에서 고묘교회 성도와 출향 성도들이 한마음이 되어 김성식 목사의 숭고한 신앙과 순교정신을 기리고 후손에게 물려주기 위해 순교비를 세우기로 결의하고 2019년 5월 28일 창립 83주년을 맞으면서 이곳에 순교비를 세우게 되었다. - 2019년 5월 26일 고모교회 성도 일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