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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님양교구 제446 강습소를 열어 교인들을 교육시키는 한편 이 지역의 교 인들을 위해 수촌리 전교실에 강습소를 열고 교세 확장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 습니다, 1918년 중앙대교당 건축 성금을 모금할 때에도 남양교구 순회교사로 교 인 가정을 방문하여 많은 금액을 모금하여 중앙총부로 올려 보내 3·1운동의 거 사자금을 마련하는데 큰 몫을 했습니다. 1919년 3·1운동 당시 54세였던 백낙 렬 선생은 천도교 남양교구 순회교사와 장안면 구장회장직과 함께 수촌리 구장 을 겸직하고 있었습니다. 백낙렬 선생은 우정 -장안면 3 · 1운동을 이끌었고, 일제 의 감시밍을 피해 3년간 충청도 계룡산에 피신해 있었습니다. 그푸 10년 동안을 고주리 천덕산 수도암에 은신해 있으면서 교인들의 집을 전전하다가 신병을 얻 어 집에 틀을아왔습니다. 집에 돌아온 백낙렬 선생은 일본경찰의 눈윤 피해 살다가 1936년 11월 20일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채 쓸쓸히 눈을 감고 말았습니다. 정 부에서는 고인의 공적을 인정하여 2002년 건국포장을 수여 독립유공자로 포상하 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