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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명되었습니다. 당시에 지방교구는 교도가 100호 이상되는 구역에 설치했고, 교구 가 101R 이상 되는 곳에 대교구를 설치했습니다. 수원과 화성지역의 천도교세가 매우 컸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수원대교구로통합되기 전까지 남양교구는독립되어 있었는데, 1908년남 양교구에서는 덕다리 김창식을 차출하여 서울의 천도교중앙총부 교리강습소 사 범과에서 교육을 받도록 했습니다. 당시 남양의 교인은 1천여 가구 였으며, 교세 가 확장되자 한세교를 중심으로 남양교구로 분립하게 되었습니다. 1910년 이후 남양교구에는백낙온, 우영규, 김인태, 조동술, 나천강, 김현조등이 교구장을 역 임했고, 우정 장안면 3·1운동을 이끌었던 백낙렬은 금융원에서 전제원으로 있다 가 3·1운동 당시 남양교구 순회교사로 있었습니다. 우정 장안면은 일찍부터 동학이 전파되어 1910년에는 이미 천도교 남양교구 산하에 수촌리-독정리·어은리 -장안리·회잔리 -이화리 고주리 매향리등 8개 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