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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옥은 평남 평양(平壤) 사람이다. 1919년 평양(平壤)에 있는 숭의학교(崇義學校) 졸업반으로서 3·1독립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3주일 동안 구류되었다. 그후 동창유지 및 임시정부 연락원인 임득삼(林得三)·김정직(金鼎稷)·김순일(金淳一)·김재덕(金在德) 등과 공모하여 군자금을 모집하고 임시정부 공채를 대량으로 판매하여 그 자금을 임시정부로 송금하는 등의 일에 관련하여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소위 제령위반(制令違反)이라는 죄목으로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고 출감하였다. 출옥한 후인 1920년 8월에 문일민(文一民)·장덕진(張德震) 등을 도왔으며, 또한 전국에 흩어져 있는 애국 동지들과의 접선을 하기 위한 방편으로 평양청년회 여자 전도단을 조직한 후 여자전도대장으로서 전국을 순회하며 강연을 하고, 비밀 공작도 전개하였으나 일본 경찰에 발각되자 1920년 9월에 목선을 타고 상해(上海)로 탈출하였다. 상해에 도착한 후, 이승만(李承晩)·안창호(安昌浩) 등을 만나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중, 독립전쟁을 위한 군관 양성의 일환으로 임시정부의 추천을 받아 1923년에 운남육군항공학교(雲南陸軍航空學校)에 제1기생으로 입학하였다. 1925년 졸업 후에는 임시정부의 소개로 혁명 기독장군 풍옥상(馮玉祥) 휘하 공군에서 한국 최초의 여류비행사로서 복무하였다. 1927년에 장개석총통(蔣介石總統)이 북벌(北伐)할 때, 동로 항공사령부(東路航空司令部)에 최용덕(崔用德)과 함께 가담하는 등, 10여년 동안 중국 공군에서 복무하였다. 또한 1928년 5월 31일에는 남경(南京)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중경(重慶)에 있는 국민정부 육군참모학교의 교관으로 임명되어 후진 양성과 함께 적 정보를 연구하여 직접 가르치기도 하였다. 1943년에는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 직할로 김순애(金淳愛)·방순이(方順伊)·최선화(崔善燁)·최애림(崔愛林)·최형록(崔亨祿) 등과 함께 한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사교부장(社交部長) 등으로 활동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힘썼다. 그후, 광복을 맞이하게 되자 1949년에 귀국하였다. 정부에서는 여사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