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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은 어려서부터 신학문을 익혀 배재학당(培材學堂)·흥화학교(興化學校)·우무학교(郵務學校) 등에서 수학했으며, 1908년 부친 탈상 이후 집안의 노비들을 과감히 해방시키는 등 봉건 유습의 타파에 앞장섰다. 그리고 기호학회 평의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1910년에는 강릉의 초당의숙(草堂義塾)에서 민족교육에 매진하기도 했다. 1911년 기독교 목회자가 되기 위해 평양의 장로교연합신학교에 입학했으나, 중국 여행 중 생각을 바꿔 1914년 중국 난징[南京]의 금릉대학(金陵大學)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였다. 이 무렵 그는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기도 했다. 1917년부터 상해로 무대를 옮겨 민족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해 갔다. 1918년 상해고려인친목회를 조직하여 총무로 활동하면서, 기관지『우리들 소식』을 발행하였다. 이 무렵 그는 구미에 유학하려는 70여 명의 한국 학생들에게 유학을 알선해 주기도 했다. 1918년 8월 터키청년당을 모방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조직하고 총무로 활약했다. 마침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강화회의가 열리게 되자, 그는 텐진[天津]에 있던 우사(尤史) 김규식(金奎植)을 초빙하여 파리강화회의 파견대표로 파견했다. 그리고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독립문제를 크게 부각시키기 위해 거족적인 민족운동을 계획 추진했으니, 그것이 3·1운동의 태동이었다. 그는 장덕수(張德秀)를 일본에 파견하여 2·8독립선언을 촉발케 했으며, 국내에 김철(金徹)·선우혁(鮮于爀) 등을 파견하여 국내 인사들과 접촉하게 하고, 자신은 간도·시베리아 방면으로 가서 만세운동의 분위기를 진작시켜 나갔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3·1운동이 일어나는 원동력이 되었다. 여운형은 만주와 노령 등지에서 독립운동의 중앙 기관을 상해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이때 이동녕(李東寧)·조완구(趙琬九)·조성환(曺成煥) 등의 동의를 얻어낼 수 있었다. 이 무렵 여운형은 독립운동의 통일적 조직형태를 강조했지만, 임시정부와 같은 거대의 조직형태보다는 당(黨)에 의한 결합을 주장했다. 3·1운동 직후 1919년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외무부 차장, 임시의정원 의원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1919년 11월에는 적국의 심장부인 일본 동경을 방문하여 일본 고위 관료들을 상대로 한국독립을 역설하여 일본은 물론 국제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상하이[上海]를 무대로 활동하면서 한인 교민사업에도 관여했으며, 인성학교(仁成學校) 설립과 동교 교장으로서 민족교육에도 힘을 쏟았다. 1920년 여름 국제공산당 위원 보이친스키가 공산주의 선전을 위해 상하이에서 한인독립운동자 중 유력자회의를 개최하고자 할 때, 여운형은 김만겸을 통해 보이친스키와 회견을 가졌고, 이어 고려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이때 고려공산당 입당은 '독립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써 공산당의 원조를 기대한'때문이었다. 그런데 1921년 김립(金立)의 노농정부 자금횡령사건으로 그는 이동휘(李東輝)와 결별하고, 김만겸(金萬謙)이 주도한 이르쿠츠크파와 고려공산당 상해지부에 참가했다. 1921년에는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 결성에 참가하여 한·중 양민족의 공동 투쟁과 이해증진을 모색하였다. 한·중연대를 통한 독립운동의 방도를 강조했던 그는 국제정세의 흐름에서 한국독립운동의 나아갈 방향을 찾고자 했다. 그리고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극동피압박민족대회가 열릴 때 조선민족 대표의 일원으로 참석하여 조선독립을 역설하였다. 상해로 돌아와서는 1922년 10월 독립운동의 장기적 구도 아래 백범(白凡) 김구(金九) 등과 함께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조직하여 군사적 투쟁도 준비해 갔다. 동회는 '10년 동안 1만명의 노병 양성과 백만원 이상의 전비 확보'를 목표로 하여 조직한 단체였다. 그러는 가운데 독립운동계에서 임시정부의 재편 문제가 크게 부상하자,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주도했다. 1923년 초부터 국민대표회의가 열릴 때 그는 안창호 등과 함께 '임시정부 개조'를 주장하였다. 그가 사회·정치사상을 초월한 독립운동계의 조직 통일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된 것은 1922년 1월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하면서였다. 독립운동전선의 단결과 재정비를 목적한 국민대표회의는 코민테른의 동방정책과 중국의 국민혁명(國民革命)이라는 국제적 조건과 우리의 독립운동전선이 조응하며 일구어낸 성과물이었다. 이때 개조파에 섰던 그는 당초 기대와 달리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되자, 이후 중국의 국공합작(國共合作)에 깊은 관심을 쏟았다. 그는 중국 공산당원 구추백(瞿秋白)과 손문(孫文), 그리고 요페·카라한·보로딘 등 소련 고문단 등의 인사들과 접촉하면서 중국 국공합작 성립에 노력하였다.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들에게 한국 독립운동의 역할과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이 무렵 그의 중국혁명론은 '국민당(國民黨)과 군벌 풍옥상(馮玉祥)의 협상, 국민당의 중국공산당 지원과 상호 연대, 소련의 중국공산당에 대한 지원'등의 구도로 설정되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견해는 곧 국공합작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으로 당시 중·소 인사들에 의해 크게 환영받았고, 이로써 그는 중국국민당·중국공산당과 소련 사이에서 연락 책무의 중요한 역할을 맡기도 했다. 그의 이러한 활동은 한국독립운동의 연장선에서 이뤄진 것이었다. 즉 그는 중국혁명의 완성을 한국 민족혁명의 전제로 보았고, 또한 중국의 혁명론과 같은 방식에서 민족혁명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1925년 1월 중·소협정이 체결될 무렵, 그는 중국인 공산주의자 왕걸(王杰) 등과 함께 상해에서 중국의 국공합작과 한국독립운동의 연대, 한국 사회주의운동세력의 통합, 약소민족의 운동세력과 국제적 연대 등을 골자로 하는 협약을 맺으며 한·중연대를 통한 민족운동을 구상해 갔다. 그는 국내 사회주의자들과도 밀접하게 연관을 맺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25년 12월에 조선공산당이 발각되면서 김찬(金燦)·김단야(金丹冶) 등이 상해로 망명해 오자, 이들과 함께 1926년 1월에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를 조직하였다. 이 무렵 그는 광둥[廣東]과 상해를 왕래하며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1926년 1월 광둥에서 열린 중국국민당 제2차 전국대표대회에 참석하여 '중국혁명에 대한 국민당의 사명'이라는 제하의 축사에서 중국의 국민혁명이 약소민족의 해방과 직결된다는 연설을 행한 바 있었다. 또한 그는 황포군관학교 교관 손두환의 주선으로 장개석(蔣介石)을 만나 한국독립운동의 자금지원 및 한인 청년들의 황포군관학교 입교문제 등을 교섭하여 일정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는 동년 2월에 임시의정원 부의장직을 사임하고, 상해파 사회주의 세력과 연합하여 1926년 2월에는 주의자동맹을 조직하고 '무산운동과 민족운동과의 연합'을 표방하면서 사회주의운동을 진작시켜 나갔다. 또한 광둥에서는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를 결합한 비밀결사 공청사(共靑社)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동년 5월 상하이[上海]에서 안공근(安恭根)·조상섭(趙尙燮)·최창식(崔昌植)·이유필(李裕弼)·오영선(吳永善) 등과 한국독립운동촉진회를 결성한데 이어 6월에는 다시 광둥[廣東]을 찾아 조선공산당 광동지부 설치에 힘을 기울였다. 한편 융희황제가 승하하자, 이를 만세운동의 절호의 기회로 삼아 임시상해부가 6·10만세운동 계획을 추진해 갈 때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만세운동때 사용하기 위한 격문을 최창식(崔昌植)이 경영하는 삼일인쇄소에서 인쇄하게끔 알선하는 한편 6·10만세운동에 때맞추어 병인의용대(丙寅義勇隊)가 국내 의거를 추진하는데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렇듯 상하이를 주무대로 활발한 항일투쟁을 벌이던 중, 1929년 영국의 식민정책을 비난하다가 영국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된 뒤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33년 조선중앙일보사(朝鮮中央日報社) 사장에 취임하여 언론을 통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36년 8월 베를린올림픽대회 손기정(孫基禎)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조선중앙일보 사장직에서 물러났으며, 이로 인해 조선중앙일보는 폐간되었다. 1940~1942년 에 여러차례 도쿄[東京]을 방문한 바 있는 그는 일본의 패망을 확신하고 1944년 8월 비밀리에 건국동맹(建國同盟)을 조직하여 조국광복을 준비해 갔다. 두 차례에 걸쳐 일경에 검거되어, 징역 3년과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츨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