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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4월30일 화요일 2 (제148호) 기 획 앞서 살핀 대로, 왕건은 경애왕 위기를 방관했었다. 왕건의 방관 속에 경애왕은 포석정 행이라는 극단의 선택을 했다. 그 로말미암아경애왕은시해됐고견훤이입성했다. 왕건은 희한하게도 시해 소식을 듣자마자 사신을 보내 조제 (弔祭)했다. 또 그간의 철저한 방관자적 입장을 청산하고 5천 정기를직접이끌고남하했다. 태조는정예한 기병5천을이끌고공산아래에서견훤을맞아크게싸웠 다. 태조의 장수인 김락과 신숭겸이 죽고 모든 군사들이 패배했다. 태조는 겨우죽음을면했을뿐 대항하지못했다. 그로 하여금낳은죄악을범하도 록내버려둘 수밖에없었다. (븮삼국유사븯권2기이2후백제견훤조) 태조가 정예 기병 5천을 데리고 공산 밑에서 견훤을 기다리다 크게 싸웠 다. 태조의 장수 김락과 신숭겸이 전사하고 모든 군사가 패배하여 태조는 겨우몸만 빠져나왔다.(븮삼국사기븯권50열전10견훤) 왕건이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했다. 친히 정예군 5,000명을 거느리 고 견훤(甄萱)을 공산동수(公山桐藪)에서 맞이하여 크게 싸웠다. 견훤의 군사가 왕을 포위함이 위급하였다. 대장(大將) 신숭겸(申崇謙)과 김락(金 樂)이 힘써 싸우다가 전사하고 제군(諸軍)이 패배했다. 왕은 겨우단신(單 身)으로 모면하였다.(븮고려사高麗史븯권1세가1태조10년9월조) 왕건(고려왕)이 경애왕시해소식을듣고사신을보내어조제(弔祭)하고 친히정예(精銳)한 기병(騎兵) 5천명을거느리고견훤을공산동수(公山桐 藪)에서맞아크게싸웠으나이기지못하였다.견훤의 군사가매우급하게 왕을 포위하여 대장 신숭겸(申崇謙)븡김락(金樂)이 힘껏 싸우다가 죽고, 모 든부대가패배하니왕은겨우단신으로 탈출하였다. (븮고려사절요븯 태조1 0년9월조) 신라의 거듭된 구원 요청에도 철저히 침묵으로 일관했던 왕 건의 전례를 생각하면 이는 참으로 뜻밖의 반응이 아닐 수 없 다. 왜 왕건은 서둘러 남하를 택한 것일까. 행여 견훤에 의해 권 좌에 오른 김부가 구원을 요청하기라도 했던 것일까. 이에 대 한단서가다음에있다. 그대가 흉악한 위세를 다시 부려서, 벌과 독충 같은 해독이 백성들에게 미치고,호랑이와승냥이 같은행패가전국을몰아쳐서,금성이 위험에빠지 고왕궁에혼란이 일어날 줄을어찌알았으랴? 정의에입각하여주나라왕 실을높이는일에제환, 진문의패업과 같은자가누구이겠는가? 기회를엿 보아 한 나라를 전복하려 한 것은 오직 왕 망, 동 탁의 간악함에서만 볼 수 있는일이다.(븮삼국사기븯권50열전10견훤‘왕건이 견훤에게보낸답서’중) 그대는 털끝만한 작은 이익을 위하여 천지와 같이 두터운 은혜를 잊고 있다. 임금을 죽이고 궁궐을 불살랐으며, 재상과 관리들을 모조리 살육하 고, 양반과 상민을학살하였으며, 귀부인을잡아수레에같이 태우고, 진귀 한 보물을 빼앗아 짐으로 실어 갔다. 그대는 걸, 주보다 더 포악하며, 맹수 보다 더욱 잔인하다. 나는임금의 죽음에 원한이 사무치고, 백성의 원수를 물리칠마음에충만해있다. 역적의처단에진력하여미미한 충성을표하 기로 하 고, 다시 무기를 든 후 두 해가 지났 다. (븮삼국사기븯권50열전10견훤 ‘왕건이 견훤에게보낸답서’중) 경애왕 시해 직후 견훤은 왕건에게 편지를 보냈다. 위의 글 은 거기에 대한 왕건의 답서이다. 왕건은 견훤을 왕망이나 동 탁에,자신은 제 환공,진 문공에 비유했다.또 사직을 바로잡는 다는 견훤의 명분을 거친 언투로 반박했다. 경애왕을 거세한 행위가사직의전복(顚覆)과같다고도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왕건은 견훤을 역적이라 칭했고 경애왕 시해의원한을갚으려이태동안줄곧부심해왔음도밝혔다. 왕건의 논리대로 견훤이 역적이라면 역적에 의해 옹립된 김 부는 역적과 연루된,또 다른 역적이 된다. 김부는 신라의 왕일 수 없으며, 이런 맥락에서 왕건은 신라 사직이 전복되었다고 표현했던것이다. 왕건은 이런 사태를 좌시할 수 없다는 뜻을, 미미한 충성이 나마 표하기로 했다는 표현에 담아 전하고 있다. 한데 왕건의 이 모든 말들은 진정성을 믿기 어렵다. 말하자면 철저히 실리 를 따져 계산된 명분이요,전황을 자신에게 이끌려 계획되어진 수사(修辭)일따름이었다. 왕건의 속내는 경애왕의 죽음을 조상하기보다는 최대한 이 용하려 했었다고 짐작된다.견훤과 김부 일당의 경애왕 시해를 묵과할 수 없는 하극상의 악행으로 규정한 데서, 왕건은 이를 빌미로 신라왕실과 견훤 모두를 일거에 제압하려 했다고 여겨 진다. 경애왕이 피살된 이후 왕건은 고려군을 이끌고 남하했다.합 천 대야성에 진주했던 김락 또한 참전했다. 이 점만 봐도,당시 왕건의 남하와 김락 군의 북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고 려군의 전격적이고 총체적인 진격이었다고 할 수 있다.하지만 그토록 인자했다는 왕건에게 충청 일대의 민심이 끝까지 수긍 하지 않았듯, 철저히 방관으로 일관했던 왕건의 늑장 조치에 민심은쉽게기울지않았다. 신숭겸과 김락, 그리고 그들을 추종하던 군사들은 공산에서 활로를 찾지 못했고, 백제군의 창검에 붉은 선혈을 뿌리며 처 참하게 죽어갔다. 기세 좋게 몰아친 견훤의 군사는 신숭겸을 왕건으로 여겨 수급을 베어 갔다. 그러는 사이 왕건은 겨우 몸 을빼어죽음을모면했다. 전해오는 얘기로는, 대략 죽은 장수만 해도 여덟, 왕건은 공 산의 앞에 팔(八)자를 덧붙여 자신을 위해 죽은 이들을 영원히 기리게했다고한다. 고려군이 깊은 슬픔에 잠겨 있는 사이, 승세를 탄 견훤은 거 침없이경상일대를장악해갔다. 왕건이 구사일생으로 송악으로 도망친 이후 견훤과 왕건은 경애왕 죽음의 책임을 놓고 치열한 명분 싸움을 벌였다. 창칼 이아닌붓으로그들은서로맞붙기시작했다. -지난날 신라의 국상(國相) 김웅렴(金雄廉) 등이 족하(足下)를 서울로 불러들여 마치 작은 자라가 큰 자라의 소리에 응하듯 서로 호응하려 하였 다. 이야말로 종달새가새매의날개를찢어헤치려는것이었다. 반드시백 성들로 하여금도탄에빠지게하고사직을구허(丘墟)가되게하였을것이 틀림없다. (븮三國史記븯 권50 열전10 견훤조 中 〈견훤이 왕건에게 보낸 편 지〉) 견훤이 왕건에게 보낸 편지는 첫 문장부터 경애왕과 왕건의 연합 작전을 준열히 비난하는 것이었다. 작은 자라는 왕건, 큰 자라는 경애왕이었다.또 종달새는 경애왕과 왕건의 연합을 가 리키며새매는견훤자신을말함이었다. 백성은 도탄에 빠질 것이고 사직이 무너질 것이라며 견훤 자 신의 절박한 심정을 밝혔다. 그 결과 경애왕의 처단은 구국의 결단이었다는변명이기도했다. 결국 이 대목은 경애왕의 죽음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견훤의 정직한 고백인 셈이었다. 흔히 아는 바대로 경애왕이 주흥에 빠졌었고 그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죽은 것이 아님을 견 훤은 자신의 입으로 고백하고 있었다.외려 경애왕이 왕건과의 적극적 군사 연합을 모색했고 견훤에 대한 심대한 위협을 초래 했기에제거할수밖에없었다는견훤의뼈아픈자기토로였다. 견훤은 그러면서 한술 더 떠 경애왕을 죽인 범인은 자신이 아니라 육부와 백료의 소행이라 주장했다. 왕을 죽인 데 뒤따 를 민원民怨이 견훤은 새삼 두려웠기 때문이기도 했거니와,왕 을 포석정에 가둬 시해에 결정적 기여를 한 세력은 따로 있기 때문이었다. - 내가 앞서 조편(祖鞭)을 잡고 홀로 한월(韓鉞)을 휘둘렀다. 하되 백료 (百僚)들에게 밝은 태양과 같이 맹세하고 육부(六部)를 의로운 기풍으로 효유하였더니 불의에 간신은 도망치고 나라 임금은 훙(薨)하였었다. (븮三 國史記븯권50열전10견훤조中〈견훤이 왕건에게보낸편지〉) 그는 채찍과 도끼를 잡아 정벌에 나선 것, 백료에게 해를 두 고 맹세하고 육부의 백성에게 의리로써 효유한 것, 그러자 뜻 하지 않게 간신은 절로 도망치고 왕은 누군가에게 시해를 당했 다는 것을 밝혔다.견훤의 어처구니없는 발뺌이고 교활한 하소 연이었다.자신은전혀무죄라는뻔뻔한주장이기도했다. 한데 이에서도 견훤의 행동을 입증할 사실들이 발견된다.견 훤이 철저하게 신라의 유력자들을 향해 설유와 회유 공작을 감 행했었다는 것, 견훤이 경애왕 시해의 책임을 떠넘길 신라 내 내응세력이뚜렷이존재했었다는것등이다. 견훤의 포폄(褒貶)에 의한다면, 경애왕의 국정을 도운 자들 은 간신이었고 이후 괴뢰 정권의 일원이 된 자들은 모두 충신 이 된다.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의리를 내세워 내응 세력과 결 탁했던 역적 견훤이,자신이 옹립한 김부의 정통성을 유시했다 는 점이었다. 이는 김부에 대한 왕건의 이의와 반발을 없애려, 견훤이극도의애를썼음을알리는움직일수없는증거다. -경명왕의표제(表弟)이자헌강왕의외손을받들어권하여존위(尊位)에 나아가게 했다. 위태롭던 나라를 다시 일으키니, 임금을 잃었다가 임금을 다시얻었다.그러나족하는나의충고를상세히살피지않고,한갓유언(流 言)만을 들어, 온갖 계교로 왕위를 넘보고, 여러 방면으로 나라를 침요(侵 擾)하였다. (븮三國史記븯 권50열전10견훤조中〈견훤이 왕건에게보낸편 지〉) 견훤이 김부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옹호한 것이야말로 둘 간 의 긴밀한 결탁과 유대가 사전에 존재했음을 보이는 결정적 증 거다.그럴수록 견훤은 왕의 시해를 둘러싸고 떠도는 유언流言 이 두려웠다. 김부를 옹립한 자신의 행위와 전략을 허물려는 왕건에 대한, 견훤의 노파심일까. 마지막 경고도 마다하지 않 았다. -나의말머리도보지못할것이며나의쇠털(牛毛)하나뽑지못할것이 다. 초겨울 도두(都頭) 색상(索湘)이 성산(星山)의 진 아래에서 손을 묶였 고, 좌상(左相) 김락(金樂)이 미리사(美里寺) 앞에서 해골을 드러냈다. 강 하고 약함이 이와 같으니 승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븮三國史記븯 권50 열 전10견훤조中〈견훤이 왕건에게보낸편지〉) 그러면서 자신이 싸움을 중지하려는 뜻을 오월의 조서를 인 용하여 말했다. 신라는 이미 괴뢰 정권으로 돌아섰다. 중론은 견훤이 거침없이 진격해 이미 공산에서 전군을 잃고 패주한 왕 건을궁지에몰아넣을것이라내다봤다. 그러나 견훤에겐 시역(弑逆)의 부담이 만만찮아 견훤의 앞 길을 가로막고 나섰다. 왕건을 계속해서 몰아붙이기 어렵다고 판단한 견훤은 애써 존왕과 사대의 마음을 깊이 간직하고 있음 을 밝혀 시역의 부담을 조금이나마 덜어보려 갖은 애를 다했 다. -나는 존왕(尊王 제후가 왕실을 높이는 것)하는 의리가 돈독하고, 사대 (事大)하는정의가깊다. 족하가우리를깨뜨리고자하여도깨뜨리지못하 고지쳐있으면서도오히려싸우려고할까 걱정되는바이다.토끼와사냥개 가서로 피곤하면마침내는조롱을받을것이요, 조개와도요새(蚌鷸)가서 로 버티면또한 비웃음을당할것이다. (븮三國史記븯 권50열전10견훤조中 〈견훤이 왕건에게보낸편지〉) 송악의 왕건은 견훤의 편지를 받고 한참동안 깊은 생각에 잠 겼다. 고려 조정은 갑론을박의 깊은 혼돈에 빠졌다. 이윽고 왕 건은 중신들과 의논 끝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견훤에게 보냈 다. -나는위로 천명을받들고아래로 백성들의추대에못 이겨외람되이 장 수(將帥)의 권한 으로 경륜 을 펼 수 있는 기회를 얻게되었다. 근래에 삼한 (三韓)이 액운을만나고구토(九土)가흉황(凶荒)하여, 백성들은대부분 황 건적(黃巾賊)에 속하고 전야는 적토(赤土 황폐하여 농작물이 생산되지 못 하는땅)가아님이 없었다. 풍진(風塵)의소란함을그치게 하고, 나라의재 앙을구제하려했다. 이에이웃 나라와친선하여우호를맺으니과연수천 리가농상(農桑)으로 생업을즐기고,7~8년동안 사졸들이 한가하게잠을 잘수있게되었었다. (븮삼국사기븯 권50열전10견훤‘왕건이 견훤에게보낸 답서’중) 왕건은 자신의 전력을 설명하며 천명을 논하였고,이어 화의 를깨고조물성을공략한견훤의전죄를공박했다. 봉채(벌과 전갈)의 해독이 생령을 침해하고, 낭호(狼虎)의 광기가 기전 (畿甸)을가로막아금성(金城경주)이 군색하여지고,황옥(黃屋븡임금의수 레,여기서는임금을가리킴)이 크게놀라게될줄을어찌알았으랴…정의 에입각하여주나라왕실을높이는일에제환, 진문의패업과 같은자가누 구이겠는가? 기회를엿보아한 나라를전복하려한 것은오직왕망, 동탁 의 간악함에서만 볼 수 있는 일이다. (븮삼국사기븯 권50 열전10 견훤 ‘왕건 이 견훤에게 보낸 답 서’ 중) 포석정 사건이 일어나기까지 사태를 방관했던 왕건은 이 대 목에서 겹겹이 장탄식을 이어갔다.급기야 견훤을 왕망이나 동 탁과 같은 간사한 자라 비웃었고 김부가 견훤에게 아들의 예를 취한것을두고크게비방했다. -왕의지존(至尊)으로서족하에게몸을굽혀아들이라일컫게까지하였 으니, 존비가차례를잃었다. (븮삼국사기븯 권50열전10견훤‘왕건이 견훤에 게 보낸 답 서’ 중) 터럭 끝 이익을 위해 천지의 두터운 은혜를 잊었다고 견훤을 비난했다. 군왕을 참륙(斬戮)하고 궁궐을 불사르며, 경사(卿 士)를 살해하고 사민(士民)을 함부로 죽이며, 희강(姬姜 희씨 와 강씨란 뜻으로 궁중의 비빈을 일컫는 말)을 취해 수레에 태 우고 진귀한 보배를 빼앗아 가득히 실은 까닭 또한 놓치지 않 고물었다. 또 견훤을 아비와 어미를 잡아먹는 경효(경은악수(惡獸)로 나면 서아비를잡아먹고,효는올빼미로 어미를잡아먹는다) 보다심한악한 으로규정했다. 임금을 보좌할 진정한 충신이 아니면 어찌 다시 사직을 편안히 하겠는 가라고 생각하였다. 사람들은 내가 야심이 없고 존왕 尊王의 정신이 간절 하다하여, 나를조정에두어국가의위급한 처지를구하도록하였다. 그대 는털끝만한 작은이익을위하여천지와같이 두터운은혜를잊고있다.임 금을 죽이고 궁궐을 불살랐으며, 재상과 관리들을 모조리 살육하고, 양반 과 상민을학살하였으며, 귀부인을잡아수레에같이 태우고, 진귀한 보물 을 빼앗아짐으로 실어 갔다. 그대는걸, 주보다더포악하며, 경효보다더 욱 잔인하다. (븮삼국사기븯 권50 열전10 견훤 ‘왕건이 견훤에게 보낸 답서’ 중) 그러나 왕건은 역시 견훤과 대전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설 사 경애왕은 제쳐둔다 해도 자신을 위해 죽은 신숭겸을 생각해 서라도 견훤과 싸워 분을 풀어줘야 마땅했지만,왕건은 견훤과 의 화의에 응할 뜻을 밝혔다.왕건의 한계가 다시 한 번 드러나 는순간이었다. -만약 족하가 예의(睿意 오월왕의 뜻)를 삼가 받들어 흉기(凶機)를 모두 놓는다면, 다만 상국의어진은혜에부응하는것일뿐만 아니라, 또한 동해 (東海)의 끊어진 왕통도 잇게 될 것이나, 만약 허물을 고치지 않는다면 후 회하여도미치지못할것이다. (븮삼국사기븯 권50열전10견훤‘왕건이 견훤 에게보낸답서’중) 화의가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그 대신 왕건은 김부의 옹립을 문제 삼지 않겠다는 뜻을 ‘동해의 왕통이 이어질 것’이라는 문 구로암시했다. 기실 견훤의 김부 옹립은 겹겹이 물의와 진통을 가져왔었다. 경애왕이 동생 효렴을 일찌감치 후계자로 정해둔 상태에서 김 부의 즉위는 역적과 결탁한 최악의 결과로서,만인이 받아들이 기 힘든 처사였다. 경애왕 시해의 부당성을 빌미로 공산에서 격전까지 치르며 견훤과 대전했던 왕건이었다.한데 사세가 불 리하자 견훤의 김부 옹립을 묵인하는 조건으로 견훤과 거래에 나선 것이었다. 하여 다시 한 번 왕건은 견훤과의 화의에 돌입 했다. 뒷날 왕건의 돌변은 이에서 끝나지 않고 김부가 자신에게 투 항하자 장인으로 삼고 그의 행위 하나하나를 정당화해주기에 이른다.왕건의 전력으로 본다면 그것은 결국 필연이었지 우연 이아니었다. 이듬해 봄 견훤은 왕건과의 화의를 깨고 강주(康州)를 기습 공격했다.고려의 원윤(元尹)김상 등이 구원에 나섰으나 도리 어 초팔성(草八城) 성주 흥종(興宗)에게 크게 패하였다. 장군 김상마저목숨을보전하지못했다. 한편강주를지키던또다른수장(守將)원보(元甫)진경(珍 景)이 군량을 고자군(古子郡)에 운반하던 중, 견훤이 강주를 습격한 사실을 보고받고 급히 회군하였으나 그 역시 길목을 지 키던 백제군의 급습을 받아 크게 패하였다.죽은 자가 3백여 명 이었고,가지고있던군량또한모두빼앗겼다.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며 강주를 지키던 장군 유문은 진경마 저 패퇴했음을 들었다. 고립무원의 처지에서 더 이상 저항할 수 없 음 을 깨 달 은 그 는 할 수 없 이 창 검 을 풀 고 견 훤 에 게 항 복 했다. 이렇게 해서 강주 일대는 손쉽게 견훤의 손에 떨어졌다. 하늘도 노한 탓일까. 초여름 온 나라가 흔들리는 지진이 있었 다. 왕건은 음력 7월, 녹음을 틈타 충청 지방의 석권에 나섰다.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현 괴산의 삼년산성(三年山城) 공격에 나섰다. 이기지 못하자 다시 군사를 풀어 청주로 향했다. 한편 왕건의 남진은 밀정의 귀와 눈을 통해 상세하게 견훤에게 보고 됐다.견훤은김훤(金萱)ㆍ애식(哀式)등에게군사3천을주어 길목에 매복케 했다. 적당한 틈을 노려 왕건의 퇴로를 끊고 급 습하게 했다. 공산에서 구사일생으로 도망친 왕건은 청주에서 다시한번생사의기로에처할판이었다. 이때,탕정군(湯井郡)을 지키던 유금필이 그 고을 남산에 올 라가 있다 잠깐 잠이 들었다. 꿈에서 어떤 대인(大人)이 나타 나그에게급한목소리로말을이었다. -내일 서원(西原)에 변이 있을 것이다. 마땅히 속히 가서 주군을 구원하 라.(븮고려사高麗史븯권92열전5유금필) 유금필이 놀라 깨어 지름길을 통해 한달음에 청주에 달려왔 다.매복한 자들과 싸워 크게 패배시키고 독기진(禿岐鎭)까지 추격하여 3백여 인을 도륙했다. 견훤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장군 관흔(官昕)을 보내 옥천(沃川)에 성을 쌓아 교두보를 치 게했다. 왕건이 충주(忠州)에 머물며 명지성(命旨城)의 원보(元甫) 왕충(王忠)을 옥천에 보내 공격하고 축성 작업 중이던 인부들 을 패주시켰다.그러자 백제의 관흔이 옥천 일대에서 물러나면 서 남쪽 대량성(大良城)을 차지했다.한편으론 군사를 풀어 누 렇게 익은 대목군(大木郡)들판의 벼(禾稼)를 베고,또 일대의 군사를 나누어 오어곡(烏於谷 일명 부곡성(缶谷城)외곽에 주 둔했다. 이로써 죽령(竹嶺)으로의 길이 견훤의 수중에 들어갔 다. 왕건이 왕충에게 죽령으로의 통행이 막혔음을 조물성(曺 物城)에첩보(諜報)하게하였다. 음력 11월 겨울이 다가오자 견훤이 직접 강졸을 거느리고 전 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고려의 오어곡성(烏於谷城)을 공격하 니 일거에 무너졌다. 그 과정에서 성을 지키던 수졸(戍卒) 1천 명이죽었다.양지(楊志)ㆍ명식(明式)등6인의장수와나머지 군사들이 견훤의 출현에 기겁하여 저항을 포기한 채 아예 성문 을열고견훤에게항복해버렸다. 오어곡성의 항복은 왕건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여섯이 나 되는 장수가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한꺼번에 견훤에게 투항 했단 사실이 왕건을 충격으로 몰고 갔다. 처음 소식을 듣고 반 신반의했던 왕건은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 속 겁화를 지울 수 없었다. 마침내 왕건은 고려에 남아 있는 일가들에 철저한 보 복을하기로마음먹었다. 여러 군사를 구장(毬場)에 모이게 한 왕건은,견훤에게 항복 한 6인의 장수에게 딸린 처자와 부모들을 모조리 잡아 살점이 떨어질 만큼의 거친 태형을 가했다.이어 갓난아이까지 그들의 식 솔 이 면 일 일 이 참 수 하 여 장 대 위 에 목 을 달 아 여 러 군 사 에 게 조리돌렸다.평소 얘기되던 관인 寬仁과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냉혈한의 면모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었다. 한바탕 피바람 을일으킨왕건은송악을떠나피정에나섰다. 왕건은 군사들을 죄다 구정 毬庭으로 불러 모으고는 양지와 명식 등 6명 의장수의아내와자식들을군사들앞에서조리돌리고저자에서목을베어 죽였다. 너희도 배신하면 이렇게 된다는 본보기를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늘온후한 성자처럼묘사된왕건이었다. 그런데그 내면에도사린, 어쩌면 진면목일지도모르는냉혈한 같은매서운일면이 기록에서삐죽불거져나 온것이다. (이도학,1998,븮진훤이라불러다오븯,푸른역사,p.224) 여름 4월 천축(天竺)의 중 삼장 마후라(三藏摩喉羅)가 고려 에 왔다. 거대한 누런 황사 바람을 몰고 천축의 중은 왔다. 온 몸에 노란 가사를 걸친 그를 왕건이 예장을 갖춰 맞이했다. 송 악에는 노란 개나리가 만발한 가운데 때 아닌 예불 행사가 열 렸다.왕건과 신하들은 세상에 영원한 평화가 깃들게 해달라고 한마음이되어간구를거듭했다. 그러나 염원은 7월 견훤의 기습 공격으로 다시 무너졌다. 견 훤이 갑졸 5천으로 김홍술(金洪術)이 지키던 문소를 공격했 다. 성주 김홍술이 백제군의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 왕건은 다 시비보를듣고,크게통곡하며슬퍼했다. 신사(辛巳)에 견훤(甄萱)이 군사 5,000명으로 의성부(義城府)를 치니 성 주(城主) 장군(將軍) 홍술(洪術)이 전사하였다. 왕이 통곡하여 말하기를, “나는 두 손을 잃었도다.”라고 하였다. (븮고려사高麗史븯 권1 세가1 태조 12 년7월조) 신숭겸, 김락이 죽었고 김홍술이 죽었다. 견훤의 나아가는 곳마다 왕건의 수족들은 죽어가고 있었다.왕건은 홍술이 지키 던성을의성(義城)이라하여홍술의의기(義氣)를표창했다. 견훤이여세를몰아또순주(順州)를침략했다. 고려 장수 원봉(元奉)이 그 예봉을 감당하지 못하고 달아났 다. 음력 10월 견훤은 좀 더 북쪽으로 올라와 고려가 차지하고 있던 가은현(加恩縣)을 포위했다. 가은현은 견훤의 출신지이 기도 했으나 그의 아비 아자개가 왕건에게 투항한 이후 뿌리 깊은고려의남방거점이되어왔었다. 견훤이 고려의 남쪽 경계를 허물며 책동을 강화하자 고려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독자 세력이 발호했다. 뭇 도적들이 틈을 노려 다투어 일어났다. 가는 곳마다 행인을 약탈하였는 데, 그 세가 사뭇 성하여 왕건이 왕도(王都)와 우호를 통하려 하여도길이막힐지경이었다. 경애왕(신라55대왕.재위924~927 ) 뱚역사비정(28) 뱛Ⅰ.왕건의예상이어그러진공산전투 박 순 교 뱛Ⅱ.왕건의거래 뱛Ⅲ.벼랑에내몰린왕건의위기 목 차 Ⅰ.왕건의예상이어그러진공산전투 Ⅱ.왕건의거래 Ⅲ.벼랑에내몰린왕건의위기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