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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장군은, 충남 부여(扶餘) 사람이다. 휘문의숙(徽文義塾)에 재학하다가 1915년 조국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은사인 이시영(李始榮)을 따라 만주로 망명하여 조국광복은 강력한 무력투쟁에 의하여 성취될 수 있다는 신념하에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에 입교하여 수학하고 졸업과 동시에 모교의 교관과 학도감으로 일하였다. 1919년 8월 7일 정의단(正義團)을 근본적으로 개편하여 임전태세의 군정부(軍政府)를 조직할 때에는 서 일(徐一)·현천묵(玄天默)·김좌진(金佐鎭)·계 화(桂和)·이장녕(李章寧)·김규식(金圭植)·이범석(李範奭) 등과 같이 주요 간부로서 참여하였다. 한편 북로군정서에서 왕청현 십리평(汪淸縣十里坪)에 설치한 사관연성소의 학도단장을 맡아 사관생도를 모집, 단기교육을 실시하였으며, 1920년 8월에는 사령관 김좌진의 부관으로서 일하였다. 1920년 10월 18일 일본군 3개대대가 무산(茂山)에서부터 북로군정서를 습격하고자 진출하자, 군정서에서는 청산리 백운평(靑山里白雲坪) 전방 삼림전투에 유리한 지점에 군사들을 매복시키고 근대를 임전 조직으로 개편하였는데 이때 그는 김좌진의 부관으로서 청산리 독립전쟁에 참가하여 독립전쟁사상 미증유의 대승리를 거두었다. 청산리전쟁 이후에는 일군의 추격을 피하여 노령으로 이동하였으나 1922년 6월에 자유시참변이후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1924년 1월에는 총재 이범윤(李範允)을 중심으로 한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에 가입, 김좌진·신일헌(申日憲)·한함산(韓咸山)·최대갑(崔大甲)·조생갑(趙生甲) 등과 함께 항일투쟁을 강화하였으며, 동년 5월에는 북로군정서 진영을 재정비 조직하게됨에 따라 행정부장에 임명되어 활약하였다. 1925년 3월 영안(寧安)에서 김좌진·김 혁(金赫) 등이 중심이 되어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할 때 김좌진·남성극(南星極)·최 호(崔灝)·유 현(劉賢) 등과 같이 대한독립군단대표로 참가하였으며, 신민부의 보안사령관으로 임명되어 군사활동에 주력하였다. 또한 신민부에서 목릉현 소추풍(穆陵縣小秋風)에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하고 연 2기(期)의 속성군사교육을 실시하였는데 그는 백종열(白鍾烈)과 함께 교관으로서 생도들의 군사교육에 진력하였다. 그러나 신민부에서 항일운동의 협조를 받기 위해서 소련과의 교섭을 위하여 그를 공산당 극동본부가 있는 블라디보스톡에 파견하였는데 1927년 게빼우에 체포되어 1930년 고루지게에서 피살되었다고 한다. 일경 정보기록에 의하면 1932년 1월 본적지의 친척형이 노령 모스크바로부터 서신을 받았다고도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출처 :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유공자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