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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파 배치문 의사 생애와 항일 독립운동 고파 배치문 의사께서는 1890년 경남 한림면 안하리 어은 마을에서 태어나 김해 보통학교를 다녔으며, 17세에 졸업한 후 1909년 20세에 전 가족이 목포로 이주했다. 1919년 목포의 3.1운동인 '4.8 만세운동'을 주도, 목포 중심가에서 만세 시위 중 체포되어 같은 해 6월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이듬해인 1920년 4월에 석방되어 목포청년회 활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으며, 1921년 3월 중국으로 망명해 1923년 상해임시정부의 국민대표자 회의에 '보천교' 대표로 참석했다. 의열단과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전달하고 의열단에 입단한 뒤 국내에 들어와 활동했으며, 1924년 의열단 사건으로 검거되었으나 무죄로 방면되었다. 이후 목포와 전남지역에서 노동,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1926년 7월에 검거되어 1928년 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 1929년 석방 후 신간회 목포지회 활동과 광주 학생독립운동의 여파로 일어난 '목포 학생 사건'을 주도했으며, 조선일보, 동아일보, 호남 평론사(1937년 12월 자진 폐간) 등에서 기자와 편집장으로 활동했다. 고파 배치문 의사께서는 "일본의 대동아 전쟁이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이니 반드시 망한다"라는 발언으로 인해 보안법 위반과 전시인심혼란 조언비어 등의 죄명으로 1941년 3월 10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이듬해인 1942년 5월 20일 향년 53세의 나이에 그토록 염원하던 조국광복을 보지 못하고 목포교도소에서 옥사했다. 1977년 04월 30일 배치문 독립유공자 신청(배치문의 5촌 당질 배종록) 1982년 08월 15일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제1370호) 추서 1983년 11월 11일 고파 배치문 기적비 건립추진 위원회 구성 1985년 03월 01일 기적비 건립 및 삼일절 기념행사(한림면 사무소 앞) 1989년 11월 16일 대전 국립묘지 독립유공자묘역(1-153)에 안장 1990년 12월 26일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건국포장 반납) 2000년 08월 15일 김해시 한림면 명동 '통일공원'으로 기적비 이전 2007년 02월 23일 김해시 삼계동 '화정공원'으로 기적비 이전 본 표지석은 2019년 3월 1일 기미년 독립운동 100주년을 기념하여 김해시의 예산으로 건립하였다. 고파 배치문 의사 추모 기념사업회 / 추모회 회장 김성영 사무국장 배호순 / 후손대표 배종태, 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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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