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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유 기미 독립의거 표지석 기미년 1919년 3월 1일에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의거가 전국으로 퍼져나갈 때 고종의 인산에 참여하기 위해 상경했다가 독립선언서를 옷깃에 숨겨 고향으로 돌아온 김종훤은 4월 11일 김승태, 이강석, 최현호 등 동지와 회합을 갖고 4월 12일에 군중을 동원하여 무계리시장에서 거사하기로 결의하였다. 주동자들이 태극기 제조와 인원 동원으로 4월 12일 정오경 무계리시장에 모인 3천여 명의군중이 김승태 등의 선창에 따라 독립만세를 제장하며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면서 우렁차게 행진하였다. 여기에 일본 군경이 총을 쏘면서 위협하자 격분한 군중은 무계리 헌병주재소로 몰려갔는데, 이 충돌과정에서 김선오, 손명조, 김용이 세 분은 일본군의 흉탄에 현장에서 순국하셨고, 동지가 쓰러진 광경을 본 군중들은 헌병주재소를 투석과 몽둥이로 파괴하였다. 이후 증파된 일군 때문에 군중은 해산되고 주동 인물은 검거되어 투옥되었다. 이때 형을 받은 주동 인물과 순국자는 다음과 같다. 김선오(면산) 54세, 장유 관동리, 순국, 애국장(1991) 손명조, 35세, 장유 유하리, 순국, 애국장(1991) 김용이, 28세, 장유 유하리, 순국, 애국장(1991) 김승태(낙운), 41세, 장유 내덕리, 징역2년, 애족장(1990) 김종훤(야암), 26세, 장유 유하리, 징역2년, 애족장(1990) 이강석(윤구), 40세, 장유 내덕리, 징역1년, 애족장(1990) 조항래, 35세, 장유 신문리, 징역1년, 애족장(1990) 조용우(용훈), 32세, 장유 신문리, 징역1년, 애족장(2007) 최현호(용강), 29세, 장유 유하리, 징역1년, 애족장(1990) 김원수(만수), 24세, 장유 신문리, 징역3뤌, 집행유예2년 안무술(술이), 22세, 장유 신문리, 징역3뤌, 집행유예2년 조봉출, 28세, 장유 신문리, 징역3뤌, 집행유예2년 조용명, 24세, 장유 신문리, 징역3뤌, 집행유예2년 정덕윤, 25세, 장유 신문리, 징역3뤌, 집행유예2년 이차수, 21세, 장유 신문리, 징역3뤌, 집행유예2년 김용주, 40세, 장유 신문리, 의거후 피신하여 5년후 고향에 돌아왔다. 1967년에 김해지역에서 가장 크고 격렬하게 일어난 이 독립의거를 기념하고 선열들의 고귀한 넋과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장유면 내덕리 용두산 상에 주민들이 힘을 모아 '3.1독립운동기념탑'을 세우고 매년 기념식을 거행해오고 있다. 오늘, 의거가 일어난 100주년에 선열들의 순국장소이자 의거지인 장유 무계동 278번지(구 헌병주재소 터)에 장유기미독립의거표지석을 세워 길이 기념한다. 2019년 4월 12일 김해3.1독립운동기념사업회, 삼일동지회김해지회 * 이 표지석은 삼일독립운동 100주년을 기념하여 김해시의 예산지원으로 건립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