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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한묵 선생은,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전라남도 해남(海南) 출신이며, 천도교(天道敎)인이다. 33세에 탁지부 주사(度支部主事)에 임명되었다가, 37세 되던 해에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하던 중, 당시 일본에 망명 중이던 손병희(孫秉熙)를 내량(奈良)에서 만나 동학(東學)에 입교하였다. 1904년(광무 8)에 노일전쟁이 발발하자, 이 기회를 이용하여 국권을 되찾고자 하여 동경(東京)에서 손병희·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조희연(趙羲淵) 등과 만난 보국안민의 방책을 협의 결정하고, 국내에 훈령하여 이용구(李容九)로 하여금 진보회(進步會)를 주관케하여 일대 민중운동을 일으키게 하였다. 1905년(광무 9)에 귀국하여 친일파로 변절한 이용구에 대항키 위해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조직했고, 이듬해 손병희·권동진·오세창이 귀국하여 서울에 천도교총부(天道敎總部)를 설치하자, 그 집강진리과장(執綱眞理課長)에 취임하였으며, 1909년(융희 3)에는 법도사(法道師), 1911년에는 직무도사(職務道師)를 역임하였다. 1919년 2월 25일경 손병희·오세창·권동진으로부터 독립만세운동에 관한 계획을 듣고,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로 약속하였다. 2월 27일에는 최 린(崔麟)·오세창·임예환(林禮煥)·권병덕(權秉悳)·나인협(羅仁協)·홍기조(洪基兆)·김완규(金完圭)·나용환(羅龍煥)·홍병기(洪秉箕)·박준승(朴準承) 등의 동지와 함께, 재동(齋洞) 김상규(金尙奎)의 집에 모여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검토하고, 그 취지에 찬동하여 민족대표로서 서명 날인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華館)에 있는 손병희 등과 함께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어 서대문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재판이 끝나기도 전에 심한 고문으로 56세의 나이로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출처 :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유공자 공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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