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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선언 민족대표 지강 양한묵 선생(獨立宣言 民族代表 芝江 梁漢默 先生) 지강 양한묵(梁漢默,1862~1919) 선생은 천도교 계통의 민족대표 33인 중 유일한 전남 출신이자 유일한 옥중 순국자의 한사람으로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경조(景朝) 또는 길중(吉仲) 호는 지강(芝江)이다. 해남군 옥천명 영신리에서 1862년에 양상태(梁相泰)와 낭주최씨(郎州崔氏) 사이에 태어난 양한국 선생은 1894년(고종31) 탁지부주사(度支部主事)로 화순군(和順郡) 능주(綾州)에서 세무관리로 근무하였고 1897년(광무 1) 관직에서 물러나 중국 1902년 일본에서 망명 차 와있던 손병희(孫秉熙), 권동진(権東鎮), 오세창(吳世昌) 등의 권유와 천거로 동학(東學)에 입교하였다. 그는 1900~1910년대에 이르기까지 천도교 교세의 확장과 각종 교리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였을 뿐만 아니라 애국계몽운동에도 깊숙이 관여하여 호남학회(湖南學會)와 공진회(共進會) 그리고 이준(李儁) 등과 함께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조직하여 크게 활동하였다. 1906년 손병희,권동진 등과 서울에 천도교 중앙총부를 결성하고, 집강진리과장(執綱眞理課長) 우봉도(右奉道)가 되었으며, 1909년 법도사(法道師)를 거쳐 1911년에는 직무도사(職務道師)가 되어 서울강습소를 개설하였다. 지강 양한묵 선생은 나라를 빼앗긴 이유가 백성들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고 1911년 기호학교와 동덕여학교를 운영하며 교육을 통해 항일정신을 심어주었다. 1919년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독립만세를 하였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힌 지강 양한묵 선생은 일본 경찰의 온갖 학대와 고문 속에서 시달리다가 1919년 5월 26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인에 많은 의문점을 남긴 채 조국의 광복을 염원하며 눈을 감고 말았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 훈장 복장(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지강 양한묵 선생의 유해(遺骸)는 1919년 서울 수철리에 안장되었다가 천도교 측의 주선으로 3년 후인 1922년 화순군 화순읍 앵남리 앵무산에 이장되었다. 화순읍 남산에는 화순군민의 성금으로 지강 양한묵 선생의 추모비가 건립되어 있고 1991년에 고향인 해남군 옥천면 영신리에 순국비가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