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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3월31일 일요일 7 (제147호) 관향조 종친회 밀성박씨밀성부원군행산공파대동보편수위원장박수옥 밀성박씨 밀성부원군행산공파 (杏山公派) 신간대동보 편찬안 내 밀성박씨밀성부원군행산공파대종회는1997년정축보수보이후20여년이경과함 에따라최근새롭게개발된전자보서시스템을활용하여신간대동보를발간하기로 하 고2018년11월부터인터넷및우편등으로수단접수를진행중에있습니다.정해진 수보기간동안에가능한많은현종님들이동참하여소중한우리의혈통에대한근본 을 올바르게하고가보(家寶)로자손만대보전될수있도록적극적인협조를당부드립 니다. ◆수단접수기한:2019년4월 30일 ◆수단접수처: 인터넷:홈페이지www.hengsan.co.kr 포털사이트(네이버,다음)“행산원”검색 우편:경남거제시아주동해와루106동606호,박행산 문의:010-9689-2525, 사무실 055-731-1206,팩스055-731-1214,행산대동정보원 ※ 수 단 이 접 수 되 지 않은 종 원 은 전 자대 동 보에 등재되 지 않으 며 , 추 후 등 재 시 수 단 비 용 이 점 차 증 액될 예정이오니가급적정하여진기한내에완료될수있도록협조바랍니다. ※수단유사명단:◆편수위원장 박수옥(010-7402-6572) ◆ 찬성사지파 박수경(010-7918-7567),박규석 (0 10-9370-2358), 박진흠 (010-3541-2344), 박정현 (010-4331-9093) ◆ 광산지파 박정웅(010-8561-2747), 박 을수 (010-3572-3335) ◆ 풍산지파 박재화(010-2557-9317), 박인천 (010-3808-1909) ◆ 전주지파 박찬우( 0 10-8642-7276),박철균 (010-3251-7489)◆소윤공지파 박봉호(010-4655-1956),박광희 (010-4420-6822) ◆ 진사공지파 박경무(010-4952-1153),박종대 (010-7276-0607)◆대구광역시 및 경상북도 일원 박규석(010- 9 370-2358),박준석(010-3829-9809) ※ 각 소문중 별 수단유사가 정해지지 않은 종중은 빠른 기간 내에 유사를 추대하여 수보/발간에 도움이 되도록 협조하여 주시 면 감사하겠습니다.아울러,주변에계시는행산공파일가분들에게신간대동보발간소식을널리알려주시기바랍니다. 1741년 밀성대군 후예 12중조 세계분파 전 종원을 수 록하여 편찬한 밀성박씨연계대보(신유보)발간에 중추 적인 역할을 한 동고·만와공의 공적을 기리기 위한 기 적비가 오는 추향때 제막식을 가질 예정으로 준비가 한 창이다. 밀성박씨대종회에서 건립을 추진하고 있는 기적비는 지 난 해 부 터 행 산 공 파 중 희 종 회 장 의 주 창 으 로 3 월 2 일 12중조 회장단회에서 결의하여 회관 옆 밀성재 성역화 사업표성비옆에세운다. 신유보는 명문거족이라도 가승도 없고 다만 두어 세 대만 전하니 증조·고조 이상은 기록치 않고 임진 왜전 의 병 화 에 공 사 (公 私 )의 문 적 이 거 의 없 어 진 즉 혹 대 보 가 있다 해도 불타버려 자상하게 상고할 수 없는 때에 국담공(휘 수춘)께서 1654년 구보를 의거하사 추선록 (追先錄)을 편찬 하면서 약간 각 중조의 일파를 기록하 고 세보를 이어 편찬할 뜻을 우리 후손에게 끼쳐 주었 고, 술재공(휘 몽징)께서 여러 종속과 더불어 족보편찬 의 뜻을 술선(述先)에 두었으나 이마저도 이루지 못하 여 동고공께서 동생 만와공과 더불어 경외(京外) 제종 에게통보하여수보하기에이른것이다. 동고 선생은 1696년(숙종 22)달구벌 남산리(현 청도 군 각북면 남산리)에서 태어났다. 휘(諱)는 윤현(胤 玄), 호(號)는 동고(東皐)이다. 어려서부터 영명하고 준수하여 재주와 능력이 있었으며, 처음부터 중부(仲 父) 술재공 몽징(述齋 蒙徵)을 따라서 학문과 예능을 배워 일찍이 성취하였고,또한 글씨를 잘 써서 사람들이 다투어 그 글씨를 보배로 여겼다. 비록 관직을 맡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얻고 잃음에 마음을 두지 않았으며, 일찍이 서울을 오가면서 어울린 사람들 대부분이 당시의 이름난 고관이요 임금 곁의 실세였으 나, 오로지 조상 위하는 일로써 서로 의지하고 도왔을 뿐이고 무슨 딴 뜻을 가지고서 윗사람들을 일부러 만나 진않았다. 그 힘을 다한바는 오로지 조상의 유업을 계승하고 종 친을 돈목시킴에 있었으니 일찍이 원근의 친족을 이끌 어서 세덕사를 짓고 시조를 비롯한 그 이하의 여러 현인 을 제사 지냈다.그리고 족보를 간행하지 않음을 한으로 여겨서 친족들과 의논하고 힘을 다하여 1741년 밀성대 군의 후손을 모두 실은 최초의 대동보 신유(辛酉) 보 (譜)를발간하였다. 이 두 가지 일은 수 백년 동안 해낼 겨를이 없었으나 실로 선생의 힘에기반 하여 해낸것이다.그리고선생은 서당을 세워서 선비들과 벗들을 불러 모으고, 가르치고 배우는 모범을 크게 펼쳐서 한 지방에 오롯한 기풍을 일 으킴으로써 선조를 계승하고 후대를 복되게 하는 일이 길 기대하였다. 그 뜻한바가 아주 부지런하고 진지하였 기 에 결 국 그 의 지 를 지 켜 낸 모 습 을 볼 수 있 는 것 이 다 . 만와선생은 1698년(숙종24)년에 태어났으며, 휘는 윤광(胤光), 字 자술(子述) 만와(晩臥)는 호(號)이다. 통덕랑(通德郞)이고, 글을 읽으며 의롭게 살았음으로 해서 그 형인 동고 선생과 더불어 같은 시기에 같이 이 름이 드러났으니 그 형과 아우를 구분하기 어렵다고들 했다. 두 살 터 울 인 형 제 를 보 면 재 주 , 그 기 상 , 그 높 은 뜻 은 같이 말달리면서 서로 나란히 맞추어 달리듯 했으리라, 어려서부터 책상을 맞대어 같이 공부했으며, 다투어 매 진하고 같이 정진 하였다.안으로는 부모님을 모시고 가 정을 가꾸며 바깥에서는 사귀어 왕래하고 응접하니 형 제가그어느하나같이어울리지않음이없었다. 서로 필요하고 서로 도움 주었으니 질 나발과 피리가 어울리는 음악처럼 화락하고 유쾌하기가 그지없었다. 그래서 세덕사를 짓고 족보를 간행하고 서당을 여는 것 역시 모두 같이 한 것이니 더불어 의논하고 같이 힘써서 이룩한것이다. 선생은 여러 번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결국 회시에서 실패하였다.그래서 벼슬할 뜻을 과감히 접고 동녘 산자 락에 정자 하나를 세우고서 ‘만와’라고 편액을 달고서 늙어 마칠 때까지 지낼 뜻을 보였다. 동고공은 이를 위 해 기문(記文)을 지었는데 자신의 뜻과 맞았기에 기문 짓기를 허락한 것이므로 그 지향하는 바가 서로 일치했 음 을 알 수 있 다 . 동고공이 돌아가시니 무릇 선조를 밝히고 빛내는 일 에 있어서는 자기 임무라고 욕심내었건만 그 뜻을 이루 지 못하고 돌아가신 것이다.그래서 선생이 종친들을 이 끌고서 시조 임금 사당 숭덕전에 비를 세워 그 공적을 찬술하자고 상소하여 임금의 허락을 받았다. 또 상소하 여 고조 국당공과 중부(仲父) 술재공에게 포상하는 은 전을 내리기를 청하였으나 이 모두가 애쓰는 마음과 참 된정성에서우러러나온것이다. 선생은 속에 품은 학식이 많았기에 이것이 글과 말에 드 러 났 던 바 그 단 아하면서도 해박함으로써 많이 알려 질 만 했 다 . 그 러 나 화 재 로 인 하 여 남 아 있 는 것 이 몇 되 지않으니한탄스럽다. 1751년 영조(27) 시조대왕의 비(碑)가 전해지지 않 음을 안타깝고 한탄(恨歎)스러워 하면서 소(疎)를 제 기하고 경채 10만냥(현 환율가치 40억여원)을 얻어 비 를세우는등전대미문의큰 일을해내기도하였다. 한편 지난 13일에는 진국 명예회장을 비롯한 원주 대 종회장,용권 은산종회장,중희행산종회장 등임원진이 모여 비문의 초안을 다듬는 등 기적비 건립에 박차를 가 했다. 밀성박씨최초연계대보편찬 동고·만와公기적비건립된다 오는추향때제막븣밀성재최초의낙관(落款)확인 밀성박씨세보-밀성대군지후12중조파를분파하여전종원이 수록 된최초의대동보. 신유보에 사용된 낙관으로 진국 명예회장이 지난 13일 처음 제기 하여전문가들에게확인한 결과 가운데글자가密城世家의갑골문 자임을확인,20일총회에서밀성재심벌로 사용키로 하였다. 우리 시조(始祖, 박혁거세)께 서는 육부촌장의 추대로 서기전 5 7년에 임금이 되시고 보령(寶齡) 73세에 돌아가시니 현 오릉에 안 장하시고, 왕비 알영 할머니도 7 일 후에 돌아가시니 같은 곳에 장 사하시었다. 장자인 남해왕이 제2대 왕에 즉 위하시고, 서기 6년에 사당을 짓고 위패를 봉안하시고, 친누이 아로(阿老)에게 년 사시에 제사 올리게 하다가 신라 소지왕 9년(480년) 시조왕 탄생지인 나정에 나을 신궁을 건립하고 위패를 이환하여 왕이 즉위하면 받듯 이 고유례를 올리게 하였고,세종대왕 11년에 현 위치에 묘전(廟殿)을 건립하여 위패를 이환하고 나라에서 축 과 폐백을 내려 춘·추로 대제를 모시는 국전(國殿)으로 예우를다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후손 언수(彦秀)가 시 조왕의 위판을 모시고 선도산 성모사에 피란하여 화마 (火魔)를 피해 1600년 중건되자 환안하게 되었고, 경종 대왕 2년(1723년) 숭덕전 전호를 내리시고, 전(殿)을 수호하는 책임자로 참봉을 두게 되어 초대 참봉 박천근 참봉이도임하였다. 1751년 박필정 선생을 비롯한 많은 선조님들이 시조 왕 위판에 왕자(王字)를 쓸 수 있도록 상소하여 이를 관 철시켰고, 1894년 갑오경장과 1910년 왜침에 국권을 상 실하게 되어 우리 스스로 숭덕전을 수호하기 위해 숭덕 전이 본부가 되어 화수회를 조직 전국적인 모금운동을 통해제향을받들며수호하게되었다. 1968년 박정희 대통령께서 헌제시간(獻祭 時間)을 야간인 자정(子正)에 올리는 것을 낮 시간대로 변경하 여 중고등학생과 범국민적 행사가 되도록 연구 해보라 는 지시가 있어 숭덕전,숭신전,숭혜전의 삼전(三殿)은 대표들이 수차례 회의를 거쳐 숭덕전은 오전 10시 숭신 전은 오전11시, 숭혜전은 정오 12시로 결정하여 시행키 로3전대표들이합의하였다. 1971년 7월 16일 박정희 대통령이 신라천년의 고향을 재현하는 것을 분부하심에 경주관광개발계획단이 이를 받들어 정화계획을 마련하고 국고보조금 4,000만원 오 릉부근의 토지 14,650평을 매입하고 서울거주 조선무약 박성수(朴性洙)회장의 특성금(特誠金)으로 구입한 탑 동 103-2번지 700평과 동소 103번지 답(畓) 490평을 국 유(國有)로 귀속(歸屬)시켜 경주관광 종합개발계획의 일환으로 년차 계획을 수립하여 조흥문(肇興門)을 세 우고 담장을 교체하고 기타 전·릉(殿·陵)을 중수하고 연못을파며능역을넓히는등정화사업을시작하였다. 그 당시 능원(陵園)이 약 2만여 평이었던 것이 현재 의 187,793㎡(56,819평)으로 확장되었고 예빈관을 신축 하여지금에이른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숭덕전은 신라시조왕을 모신 성 전으로 우리 성손만이 받들어야 하기보다 온 국민이 추 앙하는국전으로그위상을되찾아야한다고본다. 그러나 숭덕전을 장악하고 군림하기 위해 온갖 패륜 을 저지르는 자들이 막강한 돈의 권력을 내세워 줄을 세 우고, 이들을 추종하는 왈패(曰牌)들 횡포는 도가 지나 쳐 하늘을 원망하기에 이르렀다. 시조대왕의 난생설을 부정하고 중국황실의 따님의 아들이라며 표지 석을 세 우는 어처구니없는 악행을 보면서는 가슴 아픈 생각마 저 든다. 특히 숭덕전릉 참봉 11명을 숭덕전 제향에도 참례치 못하게 가로막고 특정 종파의 종원들을 동원 강 제로 내쫓는 행태는 숭적전 역사에 전무후무한 일로 기 록될 것이다.그리고 무엇보다 걱정이 된 것은 숭덕전이 사가(私家)의 재실처럼 제례시간과 제례일정을 지키지 않으면서 그 위상이 추락하여 성손들마저 외면하는 것 을두고후세의기록을염려하지않을수없다. 숭덕전의역사를알아보다 뱚특/별/기/고 (사)신라시조왕숭모회 박수태 이사장뱚 지난달 26일 무안박씨대종회 50차 정기총회 식 전행사에서열창하고있는박동인전의원 함초연구로 신지식인과 명인, 무안박 씨해남군 청년회장, 제7대 해남군의회 의원으로 잘 알려진 박동인 전의원이 이 번에는 고향 특산품인 ‘해남고구마’를 부르면서가수로정식데뷔화재다. 지난해 6븡13 지방선거에서 아쉽게 재 선에 실패하면서 전화위복이 된 것이 다. 의원 일에 집중하다 보니 그동안 해온 일에서 잠시 멀어졌다는박 전의원은 이 제는 자유인이기에 그동안 연구했던 함 초 라면과 해남군민으로서 해남고구마 를 알리고자 하는 각오가 생겼다며 연신 즐거움을 감추지 못한다. 그리고 “돈에 얽 매 이 지 않 고 내 가 가 장 잘 할 수 있 는 것부터 차근차근 준비하려 한다”고 말 한다. ‘해남고구마’는 전형적인 트롯풍의 구슬픈 창법과 귓가에 맴도는 후렴구가 인상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그리고 가사에는 옛날 추운 겨울날 방안 화로에 넣어두었던 고구마 생각이 난다. 그도 그럴 것이 박 전 의원이 해남고구마를 부를 때면 항상 부모님을 생각하고 부르 기때문에더공감대를얻는다. 박 전 의원의 어린 시절, 어머니들은 밭일 중 허기를 달래기 위해 자그마한 간식을 허리춤에 두르고 나갔다.고구마 또는 감자였다. 하지만 그마저도 어린 자식들을 위해 밭일이 끝날 때까지 차마 먹지 못하고 집으로가지고 들어오기 일 쑤였던어머니들의삶이었다. 박 전 의원은 그러한 기억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희미해졌다가도 고구마를 보 면 불현듯 떠오르고 가슴이 미어진다고 한다. 박 전 의원이 마을회관에 둘러앉 은 어머니들을 보면저절로 노래가 나오 는이유다. 박 전 의원은 “60~70 년대를 거쳐 온 이들에겐 고구마는 단순한 먹거리가 아 닌 부 모 님 에 대 한 사 랑 이 자 그 리 움 이 다”고말했다. 박 전 의원은 처음 해남고구마 노래를 만들고 직접 부르는 것이 해남 홍보에 나을지, 가수를 섭외해 부르게 하는 것 이 나을지 고민하면서 자신이 직접 부르 고 나선 것이 이제는 이곳저곳에서 찾으 면서 어느 때보다 바쁘게 보내면서도 종 중 일에는 소홀함이 없어 일가 분들이 미워할수없다고말한다. /박혁기자(무등일보,무안박씨) 박동인前해남군의회의원‘해남고구마’로가수 데뷔 지역특산품홍보등큰반향(反響)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