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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3월31일 일요일 2 (제147호) 기 획 김부는 견훤의 지지, 후광으로 신라의 권지국사에 올랐다. 견훤은 서라벌 왕도에 들어서기 직전, 두 달간 영천에서 머물 당시신라사직을바로잡겠다는선언을한적도있었다. 전번에(신라의) 국상김 응렴등이 그대를서울로 불러들이려한 것은, 마치 자라가 큰 자라의 소리에 응하고, 참새가 새매의 날개를 헤치려고 하 는 행위로서 이는 반드시 생령을 도탄에 빠뜨리고 종사를 폐허로 만들게 할 것이다. 이 때문에 내가 먼저 조씨의 채찍을 잡고, 홀로 한씨의 도끼를 휘둘렀으며, 모든관리들에게태양을두고맹세하고, 6부에올바른취지로 타일렀다.(븮三國史記븯권50열전10견훤조) 즉 박씨가 가진 왕위를 김씨에게 돌리겠다는 선언을 함으로 써 신라 내 내응을 얻고자 한 행위였다. 혹자는 견훤이 김씨 왕 통의 복구를 내세워 행위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다고 보기도 했다. 이는바로 경애왕및그의일파를제거하고새로운왕을옹립하고자한 견훤의 뜻을 그대로 나타낸 말이라고 생각한다. 중략 …. 그동안 박씨인 경애왕의 정통성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던 김씨 진골세력들의 불만을 이 용, 경애왕을제거하기위하여경주를쳐들어간것이라해석할수있다. 아 울러 견훤이 사전에 김씨 진골세력들과 어느 정도 연계를 맺고 있지 않았 나 하는 우리의 의심도 위의 사료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신호철, 븮후백제 견훤정권연구븯,일조각,1996,p.115) 과연 박씨 왕권은 여론의 지지를 잃고, 정통성을 상실한 것 으로 안팎에 비칠 만큼 파기될 왕조였던가. (그를 논하기에 앞 서 경주란 말의 사용을 지적하고 싶다. 위 논자가 무슨 의도로 경주를 사용했는지 모르겠으나 신라 역사를 논하는 한, 이는 어울리지 않는다. 경주는 신라가 붕괴된 이후 왕건에 의해 불 린이름이다.유감스럽게도경주란말에는신라역사가없다.) 다시 견훤의 행위를 유심히 살펴보자. 위의 주장과는 전혀 뜻밖의 사실을 만나게 된다.김씨 왕통의 복위를 추진했었다던 견훤은 이후 김씨 왕통의 정당성을 안팎에 과시하기는커녕 그 와는정반대의움직임을보인다. 그러나 뜻밖에 간신들이 도망하고 나라 임금이 변을 당해 죽었으므로, 경명왕의 외종제인 헌강왕의 외손을 받들어 왕위에 오르도록 권하여 위태 한 나라를 재건하였으니, (븮三國史記븯 권50 열전10 견훤조 中 〈견훤이 왕 건에게보낸편지〉) 그리고왕의아우뻘(족제)되는사람으로 하여금임시로 국사를맡게하 였다. 이 사람이 경순왕이다. 乃立王之族弟, 權知國事, 是爲敬順王.(븮三國 史記븯권12신라본기12경애왕4년조) 견훤은 군사를 풀어놓아 크게 약탈하고 궁궐에 들어가 머물며 좌우(左 右)로 하여금 왕을 찾아내게 하여 군사들 가운데에 두고 핍박하여 스스로 목숨을끊도록하고중략 …. 왕의표제(表弟)인김부(金傅)를세워왕으로 삼았다. 왕의 동생 효렴(孝廉)과 재신(宰臣) 영경(英景) 등을 포로로 하고 자녀들과 수많은 장인(匠人)들과 병장기와 진귀한 보물을 모조리 약탈하 여돌아갔다.(븮高麗史븯권1세가1태조10년9월조) 견훤은 김부를 신라왕으로 옹립했다.또 왕건에게 편지를 보 내 김부의 정통성을 선전했다. 김부가 견훤에 의해 정통성이 강조되고 있다. 이 점부터 둘의 밀착관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한데 견훤은 김부를 경애왕의 표제, 족제, 또는 경명왕의 외종 제(表弟)라는 등 박씨 왕계와 관련짓고 있다.경애왕과 김부의 외조부는 헌강왕이다. 둘은 외종제이므로 족제로 볼 수도 있 다. 그렇다고 해서 경애왕의 뒤를 김부가 이을 만큼 정치적 공 감대를공유했다고볼수없음은물론이다. 그렇다면 의문은 왜 견훤이 김부를 박씨 왕통과 이으려 했느 냐는 점이다.김씨 왕실의 복위가 내외에 바람직하게 받아들여 졌다면 왕건과의 날카로운 신경전이 벌어지는 와중에서 구태 여 김부를 박씨 왕계에 가탁한 현상이 나타날 리 없다. 외려 정 통성이 없는 박씨 왕권을 무너뜨렸고 김씨 왕통을 회복하였음 을 자랑스레 밝혀야만 한다. 한데 견훤은 어떻게든 김부의 출 자를박씨왕계와연결하려애쓰고있다. 도성에 들어서자마자 온갖 살육마저 두려움 없이 행했던 견 훤이, 왜 왕계 王系에서만은 굳이 경애왕, 경명왕과의 조그만 끄나풀이라도 내세워 김부와 연결하려 애썼을까. 게다가 이미 상당수 사람들이 박씨 왕권과 그간 대립각을 세운 김부의 전력 을 알고 있었을 터임에도 말이다. 견훤과 협잡하였고, 내응을 통해 경애왕을 죽였으며, 그 반대급부로 즉위한 김부는 지지 기반이 약할 수밖에 없다.여러 정황을 검토할 때,견훤은 이처 럼 기반이 허약한 김부의 괴뢰정부를 지탱할 명분을 박씨 왕계 와 연결, 자연스런 승계를 강조하는 방법에서 찾을 수밖에 없 었을것이다. 앞서 말한 대로 견훤과 왕건은 ‘존왕(尊王)’을 다투어 표방 했다. 그럼에도 견훤은 경애왕을 높이기는커녕 도성을 침입하 여 죽였다. 이 모순의 이면에는 견훤을 향한 경애왕의 일정한 견제 역할이 주효했던 측면이 있었다. 또 견훤은 경애왕을 죽 인 직후 김부를 옹립했다. 김부가 옹립된 까닭은 경애왕과 그 간 대립했었고, 정치 전반을 바라보는 시각이 경애왕과 전혀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김부를 경애왕 일가와 혈연으로 맺으려 한 것은 역설이다. 이것은 김부의 즉위가 그만큼 부자 연스러웠고 환영받지 못했던 까닭이 작용한 때문일 것이라 여 겨진다. 김부가 견훤과 결탁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앞 서 말한 대로 김부 일가는 누대(累代)에 걸쳐 민심을 잃었다. 이 점이 외부세력과 결탁하지 않을 수 없었던 주된 요인이었을 것이다. 또 하나 경애왕이 후계체제를 구축한 상태였을 점을 들수있다.경애왕의동생효렴의존재가그것이다. 왕의 동생 효렴(孝廉)과 재신(宰臣) 영경(英景) 등을 포로로 하고 자녀 들과 수많은장인(匠人)들과 병장기와진귀한 보물을모조리약탈하여돌 아갔다.(븮高麗史븯권1세가1태조10년9월조) 견훤은 경애왕 시해 이후 왕제 효렴과 재상 영경을 질자質子 로 삼아 전주로 압송했다. 이는 그만큼 효렴의 존재가 김부에 겐 위협적이었음을 시사한다.또 경애왕 정권의 핵심 세력이었 다는 말도 될 것이다.경애왕 역시 즉위 이전 형 경명왕 치세에 상대등을역임하며차기왕위를준비했었다. 견훤의 이 조치는 효렴을 중심한 후계 체제의 타파일 수 있 다.경애왕의 뒤를 효렴이 승계하는 구도가 확정되었다면 김부 의 왕위 계승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 민심마 저 김부 일가에게서 등을 돌렸음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김 부의 처지로선 역시 최후 수단을 생각할 상황이다. 왕건과 경 애왕이 밀착관계를 유지한 이상, 자신의 집권을 위해 김부는 견훤과결탁할수밖에없는입장이었다. 여기서 다시, 견훤이 9월 이후 11월까지 영천(고울부)에서 뚜렷한 전과도 없는 상태에서 두 달간 머물렀다는 점을 눈여겨 볼 필요성이 있다. 왜 견훤은 신속한 결정이 요구되는 순간에 서 두 달이란 시간동안 영천에 머문 것일까. 견훤은 김부의 내 응에 상당한 확신을 지녔고 퇴각대신 영천에 잔류했을 가능성 이 제기된다. 견훤이 후삼국 판도의 결정적 변화를 이끌지 못 한 채 퇴각할 경우, 경애왕과 왕건의 협력 관계는 강화될 것이 고 그에 따라 견훤의 입지나 김부의 권력 회복 가능성은 현저 히떨어진다. 이점에서 논자들의 지적대로 김부와 견훤이 사전 밀약을 맺 고 포석정 잔치를 기획하고, 전황의 결정적 변화를 꾀했을 가 능성은극히높은셈이다. 그렇다면 포석정 잔치는 역시 김부가 주최했을 가능성이 크 다. 단 위의 견해에서 김씨 세력들이 정통성을 빌미로 박씨 왕 권에 저항했다는 부분은 신덕왕의 즉위를 힘의 우세로만 보았 고,김부일가의치부를 캐내어 참고하지 않았기에 나타난 오류 라 보인다. 정통성과 여론에서 모두 밀린 김부 일가로선 반란 세력과의 결탁만이 남겨진 유일한 방안이었던 셈이다. 아래에 선 기 록 을 토 대 로 포 석 정 잔 치 에 참 여 한 면 면 을 검 토 해 보 자 . 왕은 왕비 및 후궁과 친척들을 데리고 포석정에서 중략 …왕은 왕비와 함께 후궁으로 뛰어들어가고,친척과 공경대부公卿大夫및사녀士女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고 숨었다. 적에게 붙잡힌 자들은 귀한 자 천한 자 할 것 없이 놀라고 진땀을 흘리며 엎드려 노복이 되겠다고 빌었으나 화를 면하지 못했다. 王與妃嬪宗戚 遊鮑石亭宴娛 不覺賊兵至 倉猝不知所爲 王與妃奔入後宮 宗戚及公卿大夫士女四散奔走逃竄其爲賊所虜者無貴賤 皆駭汗匍匐 乞爲奴僕而不免(븮三國史記븯신라본기12경애왕4년11월조) 왕이 부인夫人과 궁녀들을 데리고 포석정에 나가 …중략 …왕은 부인 과 함께 성의남쪽이궁으로 돌아갔으며,시종하던신료들과 궁녀,악공들 은 모두 반란군에게 잡혔다. 王與夫人嬪御出遊鮑石亭 중략…與夫人歸城 南離宮 諸侍從臣寮及宮女伶官 皆陷沒於亂兵 (븮三國史記븯 권50 열전10 견 훤조) 왕은 비빈(妃嬪) 종척(宗戚)들과 포석정에서 중략…왕과 비는 달아나 후궁으로 들어가고종척및공경대부와사녀들은사방으로 흩어져달아나 다가 적에게 붙잡혔으며,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 땅에 엎드려 노비가 되 기를 애원했으나 죽음을 면치 못했다. 王與妃嬪宗戚. 遊鮑石亭宴娛. 不覺 賊兵至. 倉卒不知所爲. 王與妃奔入後宮. 宗戚及公卿大夫士女. 四散奔走. 爲賊所虜.無貴賤匍匐.乞爲奴婢.(븮三國遺事븯권2기이2김부대왕조) 왕은 더욱 황음하게 되어, 궁인과 근신을 데리고 포석정에 나가 놀면서 술을마시며연회를하다가견훤이 오는줄을알지못하였으니, 이것이 문 밖에한 금호가온 것을모른것이나, 누각위에서장여화를데리고놀다가 화를당하였던것과 다름이 없었다.景哀加之以荒樂與宮人左右出遊鮑石 亭 置酒燕? 不知甄萱之至 與夫門外韓擒虎 樓頭張麗華 無以異矣(븮삼국사 기븯권12신라본기12경순왕9년사론조) 당시 포석정에 참집한 사람들을 모두 정리하면,경애왕의 정 비,후궁(비빈),종척,공경대부,부인과 빈어(嬪御),궁인과 좌 우, 궁녀, 사녀, 악공 등이다. 이를 보면 경애왕 정권의 핵심 구 성원,궁궐의비빈,궁녀와유력 가문의 처녀들,그외에종척이 포함돼 있다. 종척은 종문(宗門) (諸槁轍次, 븮大漢和辭典븯 3권, p. 96 2.)과 인척을 함께 칭한 점에서 효종의 부인이자 김부의 모 계 아태후,김부의 부인 죽방 부인,김부의 당제 유렴 등도 참석했 다고 보인다. 대략만 해도 경애왕의 정적들까지 모두 망라한 거국적인모임이었음에의심의여지가없다. 다시 위 기록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귀천을 막론하고 노비가 되길 자청해도 모두 죽였다’고 한다. 한데 김부는 경애왕의 뒤 를 이어 즉위했으므로 생존이 확인된다. 또 김부의 당제인 유 렴 역시 포석정에서 생존했고 뒷날 김부와 왕건과의 만남을 주 선하고있다.기타일가족속들은어떻게되었던것일까. 5월 정축(丁丑)에 왕건이 신라왕과 태후(太后) 죽방 부인(竹房夫人)과 상국(相國) 김유렴(金裕廉)과 잡간, 예문(禮文)과 파진찬(波珍粲) 책궁(策 宮), 윤유(尹儒)와 한찬(韓粲) 책직(策直), 흔직(昕直), 의경(義卿), 양여(讓 餘),관봉(寬封), 함의(含宜),희길(熙吉)등에게물품(物品)을차등있게선 사하였다. (븮高麗史븯권1세가1태조14년5월조) 위의 자료는 포석정 사건 4년 후인 931년 5월의 일이다.당시 신라 왕도를 방문한 왕건은 김부의 부인 죽방부인과 당제인 유 렴, 기타 신료에게 선물을 주고 있다. 경애왕과 연결된 세력들 은 4년 전 포석정에서 거의 살육됐다.반면 견훤과의 사전 내응 아래, 이처럼 김부 일가만은 건재해 있다.당시 ‘노복을 자청해 도 모 두 죽 였 다 ’고 한 것 과 달 리 김 부 의 모 , 비 , 당 제 등 은 생 존 이 확인된다. 이는 경애왕과 연결된 세력들은 거의 살육된 반 면김부의사전내응아래,김부일가만이건재했음을뜻한다. 포석정 사건의 의문은 바로 이 점에 있다. 김부의 아비와 연 관이 있던 포석정에서 경애왕, 김부, 그의 일가 모두 동석했었 다. 한데 경애왕과 추종세력은 모두 죽고 김부의 일가만은 무 사했다. 이점은 우연이라고만 보기에 너무나 이상하다. 그 극 한 혼란 상황에서 어떻게 김부 일가만이 무사할 수 있었을까. 이에대한의문은일찍이제기된바있다. 포석정 연회에서 죽임을 당한 왕실의 종척과 공경대부들이 주목된다. 그런데 종척이라고 하는 것은 경애왕과 혈연적으로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인물을 가리킨 것으로 해석된다. 이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그 리고얼마나많은 수가 그곳에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목숨을 잃은사람 들은 적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들은 거의 경애왕을 지지하는 인물 들이거나 혹은 경애왕 측에서 활동하고 있던 인물들이라고 해도 좋을 것 이다. 적어도이들은경애왕의반대세력은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공 경대부로 지칭되는이들은당시신라왕실에서상당히높은관직을차지하 고있던진골귀족들이었다고생각된다.이들가운데서는죽임을당한 경우 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경우도있었다. 예컨대왕위에 오른경순왕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경순왕의 당제인 유렴의 경우에도 살아 있었던 것이다. (조범환, 븮신라말 화랑세력과 왕위계승-효종과 김부의 활 동을중심으로-븯,븮사학연구븯57,1999,p.45) 앞의 기록을 보면 포석정 잔치에 참여한 자들은 일단 생포되 어 땅바닥에 엎드려 있었고 살아남기 위해 노비가 되길 빌었지 만 무위로 끝나고 모두 죽임당한 것이 확인된다. 즉 시간적 여 유를가진채고도의선택적살상이있었다는것이된다. 그렇다면 죽일 자는 죽이고 살릴 자는 살린 살생부가 존재했 을 가능성이 제기된다.이런 살생부의 존재는 김부와 견훤과의 사전내응이나교감을빼고선도저히상정하기어렵다. 즉 김부의 아비가 일정한 연관이 있었던 포석정에서 경애왕 이 죽 은 점 , 그 리 고 김 부 역 시 그 포 석 정 에 당 시 있 었 고 그 일 가 만이 무사했다는 점은 우연이라고만 하기에 너무나 이상하다. 그 극한 혼란 상황에서 김부 일가만이 무사할 수 있었다는 것 은고도의선택적살상이있었다는것과같다. 김부와 견훤 간 밀약을 직접 주선한 자는 누구였을까. 일단 범위를 좁혀 보자.첫째,그 자는 함께 반란을 획책할 만큼 김부 와는 가장 가까운 인물일 것이다. 둘째, 견훤의 절대적 신임을 받았을 것이다. 셋째, 반면 왕건에게는 가장 위험한 인물로 비 쳤을 것이고 향후 왕건의 보복을 입었을 것이다. 이 경우 다음 기록들이눈에띈다. 5년봄 2월,태조가기병50여명을거느리고서울 근방에와서왕을만나 기를요청하였다. 왕은백관들과 함께 교외에서영접하여대궐로 들어 와 서마주대하며,진정한예우를극진히하였다.…중략…이로부터태조가 수십 일 체류하다가 돌아가려 하므로 왕이 혈성까지 나가서 송별하고, 종 제 유렴을 볼모로 삼아 태조를 따라가게 하였다. 중략…서울에 사는 남녀 가 서로 기뻐하면서 “이전에 견훤이 왔을 때는 마치 범이나 이리 떼를 만 난 것같았는데, 오늘왕공이 왔을때는부모를만난 것같았다”라고말하 였다.(븮삼국사기븯권12신라본기12경순왕5년2월조) 14년春2月丁酉에新羅王이 太守謙用을보내어다시만나보기를請하 였다. 辛亥에 王이 新羅에 행차할 제 50餘騎를 거느리고 畿內에 이르러 먼 저 將軍 善弼을 보내어 起居를 문안드리니 羅王이 百官에게 命하여 郊外 에서맞이하게하고堂弟인相國金裕廉等은城門밖에서맞이하게하였 으며 羅王은 應門 밖에 나와서 迎拜하니 王이 이에 答拜하고 羅王은 왼편 으로 王은바른편으로 읍양揖讓하면서전상殿上에올라(븮高麗史븯권2세가 2태조14년2월조) 夏 5月 丁丑에 王이 羅王과 太后 竹房夫人과 相國 金裕兼과 匣干 禮文 과 波珍餐 策宮 尹儒 와 韓餐 策直 昕直 義卿 讓與 寬 封 含宜 熙吉 등에게 物 品을差等있게선사하였다.癸未에王이 돌아오매羅王이 穴城(大城郡)까 지 拜送하고 金裕兼을 人質로 삼아 딸려 보냈다. 都城 사람과 士女를은 感 激하여 울며 서로 치하하여 말하기를「 옛적에 甄氏가 왔을 적에는 늑대 나호랑이를만난 것같더니지금王公이 오고보니父母를뵌것같다」고 하였다.(븮高麗史븯권2세가2태조14년5월조) 5년 봄 2월 신라왕이 태수(太守) 겸용(謙用)을 고려에 보내어 서로 만나 보기를 청하니, 고려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신해(辛亥)에 고려왕이 50여 기(騎)를 거느리고 기내(畿內)에 이르러 먼저 장군(將軍) 선필(善弼)을 보 내어왕에게문안(問安)하니, 왕이 백관에명하여 교외(郊外)에서맞이하 게하고종제(從弟)유렴(裕廉)등을보내어성문(城門)밖에서영접하게하 였으며, 왕이 응문(應門)에나아가영배(迎拜)하니고려왕이 답배(答拜)하 였다.(븮삼국사절요븯권14경순왕5년2월조) 5년 여름 5월 정축에는 고려왕이 신라왕 및 태후(太后)와 상국(相國) 유 렴(裕廉) 등에게 차등을 두어 물품을 증여(贈與)하였다. 고려왕이 인하여 수순(數旬)을 머물다가 돌아가니, 신라왕이 혈성(穴城)에 이르러 전송(餞 送)하였고유렴을볼모로 삼아고려에보냈다. (븮삼국사절요븯권14경순왕5 년 5월조) 위의 기록들은 포석정 사건이 있은 지 4년 뒤인 931년 2월 23 일에서 5월 26일까지 92일간에 걸쳐 왕건의 서라벌 왕도 방문 을 다룬 내용이다.김부가 2월 9일 태수 겸용을 보내 만나 줄 것 을 간청하자 왕건은 2주를 달려 23일 서라벌 왕도에 도착했다. 왕건은 이후 약 석 달간 머물렀다. 4년 전 견훤이 두 달간 영천 에서 머물며 왕도를 위협한 것과는 달리, 왕건은 왕도 외곽에 군영을 치고 석 달여 머물렀으나 신라의 환호와 지지를 받았다 는내용이함께실려있다. 븮고려사븯에선 왕건이 선필을 보내 도착을 알리고 이어 50여 기만 거느리고 왕도에 들어서자 교외에서 유렴이 상국으로서 일행을 영접했음이 확인된다. 김부는 응문, 즉 정문에서 왕건 을 보고 먼저 문안한 것으로 되어 있다. 반면 『삼국사기』에선 김부가 교외에 백관을 거느리고 직접 나가 왕건을 맞아들인 것 으로 되어 있다. 한쪽은 궁궐의 정문에서 맞이했다고 하고 다 른 한쪽은 교외에 직접 나가 맞이했다고 한다. 어느 쪽이 진실 을전하고있는지는잘라말하기어렵다. 하지만 일국의 왕이 교외에 직접 나갔다기보다 절차를 갖춰 영접했고 궁궐의 정문에서 왕건을 맞이한 것이 더 정확한 게 아닐까. 그렇다면 왜 븮삼국사기븯는 상세한 절차와 내용, 특히 유렴과 관련한 부분을 대폭 생략해버린 것일까.유렴이 포석정 사건에 깊숙이 관련된 결과, 고의로 은닉하기 위해 삭제한 결과는 아 닐까. 종제 유렴을 볼모로 삼아 태조를 따라가게 하였다. (븮삼국사기븯 권12 신 라본기12경순왕5년2월조) 14년春2月 辛亥에王이 新羅에행차할제50餘騎를거느리고畿內에이 르러 먼저 將軍 善弼을 보내어 起居를 문안드리니 羅王이 百官에게 命하 여郊外에서맞이하게하고堂弟인相國金裕廉等은城門밖에서맞이하 게하였으며羅王은應門 밖에나와서迎拜하니(븮高麗史븯 권2세가2태조1 4년2월조) 유렴은 김부의 종제 또는 당제로 확인된다. 931년 당시 유렴 은 상국의 지위에 있었다. 상국은 백관의 우두머리에 속한다. 이 점에서 견훤이 세운 괴뢰 정부에서 유렴은 핵심 실세였다. 또 외교ㆍ의전에 밝은 인물이었다고 여겨진다. 그가 경명왕대 왕명 출납을 담당한 시중의 직에 있은 점도 이런 짐작이 옳았 음을보여준다. 원년 8월, 왕의 아우 이찬 위응을 상대등으로 임명하고, 대아찬 유렴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븮삼국사기븯권12신라본기12경명왕원년8월조) 3년, 사천왕사의 소상이 잡고 있던 활줄이 저절로 끊어지고, 벽화에 그 려진개에서소리가들렸는데마치그 개가짖는것같았다. 상대등김성을 각찬, 시중언옹을사찬으로 삼았다.(븮삼국사기븯 권12신라본기12경명왕3 년조) 한데 유렴은 2년 만에 시중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언옹이 후 임을 맡는다. 이후 유렴의 정치적 활동은 보이지 않는다. 유렴 이 시중으로 있은 2년간 위응(경애왕)은 상대등으로 있었다. 그렇다면 두 사람 간에는 어느 정도 교통이 있었을 것이다. 한 데 경애왕이 즉위한 이후에도 그의 활동은 없다. 이것은 그가 경애왕대 핵심 권력에서 배제되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런데 견훤의 후광에 힘입어 김부가 즉위하자마자 유렴은 곧 바로 상국으로 활약했다.그렇다면 그의 정치적 기반에도 견훤 의후광,김부의신임이작용했을것이틀림없다. 이런 맥락에서 유렴은 가장 경애왕에 적대적 태도를 보인 한 사람임이 여실히 입증된다.김부와 유렴은 혈연적 관계뿐만 아 니라 정치적 이해관계에서도 서로 결합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 다. 이점에서 유렴이 포석정 음모에 긴밀히 연결되어 암약했을 개연성은 충분히 높다고 여겨진다. 그렇다면, 왕건은 유렴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던 것일까. 위를 보면 왕건은 상국 유렴 을 인질로 잡아간 것으로 나타난다.아무리 신라가 약소국이라 해도 일국의 상국을 왕건이 아무 이유도 없이 인질로 잡아갔다 는 것 은 의 문 이 간 다 . 왕건은 전군을 왕도 외곽에 주둔시키고 50여기만 데리고 입 성할 만큼 신라인을 자극하지 않으려 매사를 용의주도하게 행 동한 인물이다. 그런 그가 섣불리 평화 무드를 깨뜨리며 상국 을인질로삼아데려갔을리는없다. 만일 유렴이 아무 까닭 없이 인질로 왕건에게 잡혀 갔다고 치자. 그러면,견훤이 재상 영경과 왕자 효렴을 잡아간 것과 비 견된다. 자연 신라 도성안 사람들이 견훤과 비교하며 왕건의 덕을 칭 송한 것은 설득력이 떨어지게 된다. 뒤집어 왕건에 대한 칭송 이 사실이라면 유렴의 압송에는 수긍할 만한 문제점이 유렴 자 신에게있었다는말이된다. 이런 짐작은 문면을 통해서도 드러난다.다음에선 김부와 왕 건과의 극적인 화해가 이루어졌고 고려와 신라간의 공조 약속 이이루어졌다고한다. 5년봄 2월, 임해전에서연회를베풀어술이 취하자왕이 말했다. “내가 하늘의도움을얻지못하여점점환란이 닥쳐오고있다. 견훤이 불의의행 동을 자행하여 나의 나라를 망치고 있으니, 어떠한 통분이 이와 같을 것인 가?”왕이 말을마치고눈물을흘리자,좌우에서목이 메어흐느끼지않는 자가 없었고, 태조도 또한 눈물을 흘리면서 위로하였다. (븮삼국사기븯 권12 신라본기12경순왕5년2월조) 위 기록은 뭔가 이상하다. 포석정 사건이 쉽게 넘길 사안이 었던가. 왕건은 단번에 김부를 믿고 전폭적 후원을 보냈을까. 왕건 자신은 궁예를 배신한 직후 많은 궁예의 세력으로부터, 또 혁명을 도운 세력으로부터 숱한 반혁명을 겪었다. 허다한 배신을 겪은 왕건의 입장에선 배신자의 행위에 대해선 상당한 주의를기울이게될수밖에없다. 김부야말로 경애왕을 배신하고 견훤과 결탁했으며, 사세가 불리해지자 자신을 왕위에 옹립해 준 견훤까지 배신하려 하고 있다. 배신으로 점철된 김부,유렴의 전력이 그처럼 눈물 몇 줄 기로간단히해소됐을리는없다. 어찌 보면 왕건에게 있어 김부는 최대의 적과 동일시된다. 김부는 견훤과 결탁, 포석정 음모를 주도하여 경애왕을 죽였 다. 직후 반전을 노리며 남하했던 왕건은 공산에서 전군이 전 멸당하고 자신도 생사의 기로에 처했었다.또 개국공신 신숭겸 등핵심인물다수가불귀의객이되었다. 태조가 정예 기병 5천을 데리고 공산 밑에서 견훤을 기다리다가 크게 싸 웠는데, 태조의 장수 김락과 숭겸이 전사하고 모든 군사가 패배하여 태조 는겨우몸만 빠져나왔다.(븮三國史記븯권50열전10견훤조) 겨울 초에는도두색상이 성산진밑에서손이 묶였으며, 이 달에는좌상 김락이 미리사앞에서해골을드러내었으며, 죽고잡힌자가많았고, 추격 하여사로잡힌자가적지않았다.강약이 이와같으니누가이기고누가질 것은알 수있는일이다. (븮三國史記븯 권50열전10견훤조中〈견훤이 왕건 에게보낸편지〉) 왕건에게 이 불행한 비극을 던져 준 장본인은 견훤이다. 하 지만 그 조역은 김부와 유렴이다. 그들의 연대로 말미암아 공 산에서 수천의 고려군이 몰살당했다. 그렇다면 희생된 고려군 의 명복을 빌고 살아남은 고려군의 사기를 진작하는 차원에서 도 김부와 유렴, 둘의 죄 모두를 묵인하긴 어려웠을 것이다.그 렇다면 유렴이 인질로 끌려간 것은 포석정 사건에 대한 왕건의 징벌이었을것이분명하다. 기록을 검토할 때, 왕건이 신라 왕도에 입성한 이후 징벌을 가한 유일한 대상은 유렴 뿐이다. 또 유렴은 왕건에게 끌려간 기록만 보일 뿐, 후삼국 통일 이후 어떠한 중폐비사를 받은 흔 적조차없다. 이런 맥락에서 경명왕대 이래 핵심 권력에서 제거된 유렴은 복수심으로 김부와 견훤에게 접근,다시 권력에 복귀했으나 김 부가 견훤을 등지고 왕건과의 선린관계로 선회하며 김부에 의 해거세된하나의희생양이었다. 경애왕(신라55대왕.재위924~927 ) 뱚역사비정(27) 뱛Ⅰ.김부의출자를박씨왕계에가탁. 박 순 교 박사 뱛Ⅱ.왕위를이을수없다는절망감 뱛Ⅲ.포석정학살의유일한생존세력 뱛 Ⅳ.포석정음모의실무자는누구 ? 뱛 Ⅴ.왕건과김부 목 차 Ⅰ.김부의출자를박씨왕계에가탁. Ⅱ.왕위를이을수없다는절망감 Ⅲ.포석정학살의유일한생존세력 Ⅳ.포석정음모의실무자는누구? Ⅴ.왕건과김부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