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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3월31일 일요일 12 (제147호) 기획 박동완(朴東完,1885.12.27.-1941.2.23.)은3·1독립운동당시독립선언서에서명한민족대표33인중한사람이 다. 조 국 의 독 립을염원하는그의마음은그가남긴시에온전히녹아있다. 살을 에이고 저미는 듯하던 율렬(?烈:추위가 맵고 심하다)하던 겨울바람도 이제는 부드럽고 온화한 봄바람 이 불어온다. 북향그늘에굳게쌓인적설도자취와소리없이다사라져없어져간다.엄한의위세에압복을받아죽은듯이 엎드렸던잔 디는속잎내고버들가지눈을뜬다.동칩(冬蟄)하였던개구리소리지르고보금자리에숨었던종달새노래부 르며중천에 높이떠펄펄나른다.아침군생만물이다기뻐하는희망의때가돌아온다.인생인들슬픔에서기쁨에,고통에 서쾌락에,눌 림에서자유에기쁜때가이르지아니할까보냐.(잡지〈신생명〉1925년2월호권두언,봄의노래) 그는 일제의 억압 아래에서 자유의 기쁜 때를 희망하며 독립운동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33인 중 불교대표 로 참석했던 만해한용운의“님의침묵”에서‘님’이바로조국과부처의이중적의미를지니듯이,위의시에도이중적의미 가내포되어 있다.‘자연의봄’과‘조국의봄’,즉민족의해방이라는이중적의미가함축되어있는그의시에나타난정신은 다가오는새 세상을향한희망찬메시지가다분히실려있다.이시가발표되었던1925년은우리민족에게‘살을에이고저 미는듯한매 서운겨울바람’이불던시기였다.1919년3·1독립운동이후일제는겉으로는문화정치를표방하였으나속으로 는악랄하고 조직적인탄압으로우리민족을말살시키려하였다.이러한시기에박동완은대담하게도자연에빗대어‘군생 만물이기뻐 하는희망의때가돌아오리라’고외쳤다.그는환경에지배당하지않고오히려환경을초월하여미래를소망하 였다. 박동완(朴東完)은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한 국 땅에 첫 발을 내딛음으로써 기독교 선교가 시 작되던 해인 1885년 12월 27일 경기도 포천시 신 읍리(일명 호병굴)에서 태어났다. 그는 민족의식 이 강한 박형순(朴馨淳)의 2남 중 차남이었다.그 는 함양박씨(咸陽朴氏) 始祖公 諱 善의 26세 孫 으로 문원공파(文元公派)이며 문제공(文齊公) 박충좌(朴忠佐) 第4子인 지평공파(持平公派) 諱 번( 物)의 후손중 판서공파(判書公派) 이다. 그의 집 안 은 조 선 후 기 양 반 관 료 가 문 이 었 다 . 그 의 아 명 (兒名)은 고봉(高峯)이다. 호는 근곡(槿谷)으로 ‘방방곡곡 무궁화’라는 뜻을 지니고 있어 조국의 자주독립을 염원하는 그의 의지가 담겨있다. 일제 는 ‘무궁화’와 ‘대한’이라는 단어를 언급하는 것만 으로도‘독립’의의지를나타내는것으로인식하였 으며 ‘무궁화’와 ‘대한’의 말살을 끊임없이 시도하 였다. 따라서 일제는 박동완이 아호에 “무궁화 근 (槿)”자를 사용한 것을 노골적인 “독립의지”의 표 방으로받아들였을 것이다.또한그는일본기준의 표 준 시 간 에 따 라 살 지 않 겠 다 는 생 각 으 로 자 신 의 시 계 를 항 상 30 분 씩 늦 게 맞 춰 놓 았 다 고 한 다 . 그간 박동완의 출생지에 관하여 여러 논란이 있어 왔다. 포천(抱川)과 양평(陽平)과 서울, 이 세 곳이 논란의 중심지에 놓여있었다. 논란의 중 심이 되는 세 곳을 각각 살펴본다면, 우선 서울은 박동완의 출생지가 아니라 어린 시절(1894년 이 전)에 이주하고 주로 성장한 곳이다.그리고 경기 도 양평은 3·1독립운동 당시 작성된 경찰 신문조 서에 박동완이 출생지를 경기도 양평으로 밝힌 것으로 나오기에 일부에서 출생지로 거론되어 온 곳이다. 하지만, 다른 모든 근거는 그의 출생지가 경기도 포천임을 나타내 주고 있다. 먼저 박동완 의 장남 박대희와 차남 박창희 등 후손들의 일관 된 증언과 기록이 있으며, 국가보훈처 공훈전자 사료관의 독립유공자공적조서에도 박동완의 본 적지가 포천이라 명시되어있다. 또한, 박동완의 부친 박형순의 묘지가 경기도 포천에 위치하였 다. 그리고 함양박씨 지평공파의 집성촌이 경기 도 구리 갈매(九里 葛梅)와 포천에 형성되어 있 었다. 게다가 박동완의 장인 현석운(玄昔運)의 출생지가 바로 포천이다. 대개 동향사람끼리 통 혼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의 출생지 가 포천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그렇다면 왜 박동완은 경찰 신문에서 자신의 출생지를 포천이 아닌 양평이라 답했는지 의문점이 생긴다. 자신 의 출생지를 양평이라 다르게 말함으로써 자신의 고향마을에 가해질 수도 있을 탄압을 미연에 방 지하고자 하는 애향심에서 그랬을 수 있겠다. 그 러나 만약 박동완의 양평 출생설의 가능성을 완 전히 배제할 수 없다고 한다면 일시적으로 모친 이 양평에 가서 몸을 풀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박동완의 출생지를 양평이라 말할 수는 없다.부모가 살고 있던 포천이 바로 그의 출 생지라고보는편이타당하다. 그의 부친 박형순은 통훈감목관(通訓監牧官) 을 역임하였다. 그의 형 박동원(朴東元)은 고종3 1년(1894년) 식년생원시(式年生員試)에 3등으 로 급제하였고 과거에 급제할 당시 그의 거주지 가 서울이었다. 이후 육군 참위를 역임하였다. 그 의 조부 박사규(朴思圭)는 광양현감(光陽縣監) 을역임하였다. 박동완은 유복한 가정에서 성장하여 5세부터 독선생을 두고 집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12세 (1897년)에 포천의 명문 집안인 현석운의 차녀 현미리암과 서울에서 결혼하였다. 그의 장인 현 석운의 본관은 천녕(川寧)이며 종일품 중추원 찬 의(中樞院 贊議)를 역임하였다. 박동완의 차남 박창희에 의하면,박동완은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육당최남선(1890-1957)과는 동서지간이다. 박동완의 형 박동원이 1894년 과거에 급제할 당시 서울에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박동 완의 집안은 형 박동원의 과거급제 이전에 경기 도 포천에서 서울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1894 년(박동완의 나이 9세) 이전에 그의 집안은 한성 부 북방 누각동(현 종로구 누하동) 214번지에 정 착하였다. 이후 그는 양사동소학교(현 서울 효제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근대식 교육을 받기 시작 하였다. 그리고 관립고등소학교(현 서울 교동초 등학교: 우리나라 초등교육의 발상지)와 한성중 학교(현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한성외국어학교 (1895년 외국어를 교수하는 것을 목적으로 세워 졌으나 1911년 식민지교육을 위한 「조선교육령」 에 따라 폐교되었다) 영어과에 입학하여 수학하 였다. 이후 그는 고종 43년(1906년) 1월 5일(양력 1월29일) 농상공부기수 6품으로 관직에 임용되 었다. 지금까지 박동완의 첫 직장이 기독신보사 라 알려져 있는 것은 사실과 다르며, 그는 1915년 기독신보사 입사 전에 관직에 진출하였다. 관직 을 사직한 후에는 배재학당 고등부와 대학부에서 공부하였다. 박동완은 재판 중에 자신의 학력에 대하여 “경성 양사동소학교와 관립 고등소학교 를 졸업하고 한성중학에 입학하여 1년을 수학하 였으며, 관립 외국어학교 영어과에 입학하여 3년 을수학했다”라고진술하였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과 이어서 1907년 ‘정미 7 조약’에 따른 국권상실 앞에 민족 주체성이 강한 그로서는 당연히 좌절감을 느끼고 서구의 근대문 명을 배우고 싶었을 것이다. 따라서 근대문명을 배울 수 있는 배재학당(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중등교육기관으로, 기독교정신과 개화사상의 바 탕 아래 근대교육의 선구자적 기능을 담당하였 다)에 입학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박동완 은 양사동소학교부터 시작해서 한성외국어학교 를 거치는 동안 근대식 교육을 이미 상당히 받았 다. 이런 그가 다시 배재학당에 들어간 것은 외국 인이 경영하고 직접 교육하는 제대로 된 근대교 육을 받고자하는 열망 때문이었다. 따라서 서구 선교사가 세운 배재학당에 들어가 수학하기로 작 심한 그는 농상공부기수 6품의 관직을 사직하고 22세(1907년)에배재학당에입학하였다. 박동완은 배재학당에서 근대교육, 민족의식과 함께 기독교 정신을 수용하였다. 그는 배재학당 을 다니면서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가 구현된 민족공동체와 인류세계를 이 땅에 건설하는 것’ 을 삶의 목표로 삼게 되었다. 그렇기에 일본에 의 한 조선의 유린과 억압을 그는 받아들이기 어려 웠다. 박동완은 배재학당 재학 중에 기독교를 받 아들였으며,배재학당의 채플과도 같은 정동제일 교회에 출석하였다.그는 1908년에 존스(G.H.Jo hns, 조원시(趙元時), 1867-1919) 목사로부터 기 독교 입교의식인 세례를 받았으며 1928년 하와이 로망명하기까지정동제일교회에만출석하였다. 한국에서 기독교를 주로 수용한 계층은 지도계 층이 아니라 민중계층이었다. 지식계층은 옥중에 서 1902년 이승만을 비롯하여 1903년 말 다수가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였다. 따라서 1907년 배재 학당 입학 이후 1908년 사이에 기독교를 믿은 박 동완은 양반관료계층으로는 상당히 빠른 시기에, 또한 22-23세의 젊은 나이에 기독교신앙을 받아 들인 것이다. 근대화와 국권회복을 위해 배재학 당에 들어간 박동완은 당시 학교 상황에 따라 자 연스럽게 기독교를 수용하였으며 이를 통해 유교 적 전통을 벗었으리라. 그의 생전모습이 담긴 사 진은 몇 장 남아있지 않지만 모두가 서양식 단발 과 양복차림이다. 양반관료 계급이 연상되는 상 투와 한복 차림이 아니다. 나라의 근대화와 국권 회복을 위해 박동완은 과감히 유교적 전통에서 벗어나 당시에 파격적인 단발을 수용하였고 이를 통해내면의변화도함께일어났다. 한편, 1903년에 ‘기독교 학교’인 배재학당의 정 체성과 학생활동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배재 학생기독교청년회(StudentAssociati on of YMCA)가 설립되었다. YMCA의 세계본 부에서 초대 간사로 임명받아 1901년 9월 한국에 온 질레트(P.L Gillett, 1874-1939)는 YMCA 설 립을 준비하였다. YMCA 설립에 있어 가장 적극 적인 곳이 배재학당이었고, 1903년 10월 27일 한 국 최초의 기독교청년회가 배재학당에서 창설되 었다. 따라서 박동완도 배재학당을 다니면서 자 연스럽게 YMCA에 가입하였다. 3·1독립운동 당 시 그는 YMCA 사교부 위원이었다.이후 그는 Y MCA에서 이사, 소년부 위원장, 농촌부 위원 등 간부로서적극적으로활동하였다. 배재고등학당(3년제)을 졸업한 학생은 배재학 당 대학부(4년제)에 입학하였다. 1909년 10월에 개교한 배재학당 대학부는 모든 수업을 영어로 진행하였다. 그러나 개교한 지 3년 만인 1912년 말에 폐쇄되었다. 따라서 졸업생을 배출시키지 못하였다. 박동완은 배재고등학당에서 2-3년을 수학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1909년 10월 이나 혹은 1910년 10월에 배재학당 대학부에 입 학한 것으로 보이지만 대학부가 폐쇄되어 박동완 도 졸업하지 못했다. 1912년 말에 배재학당 대학 부에서 나오게 된 박동완은 1913년에 보성전문학 교(한국인이 세운 최초의 고등교육기관, 현 고려 대)에 입학하여 1-2년간 법률을 공부하였다. 2년 간 공부하였다면 1915년 봄에 졸업하였을 것이 다.이후 그는 정동제일교회 본처전도사(Local P reacher)로 일하기 시작하였고 1915년 12월 8일 창간된기독신보사에입사하였다. 박동완이 기독교인으로서 사회에 이름을 알리 게 된 것은 1915년 기독신보사에 입사하면서 부 터이며,이때 그의 나이 만30세였다.그의 첫 사회 생활은 1906년 농상공부기수 6품으로 시작하였 지만, 그의 생애에 있어 <기독신보>는 매우 중요 한위치를차지하고있다. 1915년 12월 8일 창간된 <기독신보 基督申報> 는 장로교와 감리교의 연합신문으로 일제 치하 가장 수명이 길었던 기독교계 주간신문이었다. <기독신보>가 창간되었던 1915년 당시에는 일제 에 의 해 억 압 과 탄 압 이 자 행 되 던 시 기 였 기 에 언 론에 대해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국인에게 신 문지법, 보안법을 비롯한 각종 악법들을 통해서 신문, 잡지와 같은 출판물의 발행을 어렵게 만들 었다. 결국 한일합방이 있었던 1910년부터 1915 년까지 민족지가 전혀 없던 시기에, 한국인들이 신문을 발행하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일제의 정책 에 맞서 외국인 선교사를 앞세우고 주필과 편집 위원을 한국인으로 두어 합법적으로 발간된 유일 한 한글신문이었다. 이런 점에서 <기독신보>는 당시 한국인에 의한 언로가 막힌 상황에서 한글 의 암흑기에 한글을 지키고 한글을 널리 보급하 는 역할을 감당하였으며 1920년 문화통치로 인해 <조선일보>와<동아일보>가창간될 때까지 유일 한 민족 언론이었다. 물론 이 시기에 한글로 된 <매일신보>가 있기는 하였으나 일제의 조선총독 부기관지로전락해버린어용지였다. 조선의 독립과 민주적 사회 등을 위한 자신의 진보적·개혁적·저항적 사상과 감정을 언론에 활 발하게 풀어내었던 박동완은 기독신보사에 재직 당시 다양한 장르의 글을 여러 필명으로 게재하 였다. 특히 주일학교는 그가 애정을 가지고 직접 관여하였던 교회기관으로 <기독신보>에는 “주일 학교”라는 고정란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어 이곳 을 통해 자신의 글을 연재하였다. 또한 <주일학 계>라는 잡지를 통해서도 적극적으로 교육에 관 한자신의생각을표출하였다. 정동제일교회 주일학교 교장으로 박동완이 재 임하던 시절 다른 교회에 모델이 될 만한 주일학 교 프로그램이 도입되었는데, 가장 특기할 만한 것은 최초의 ‘하기아동성경학교(여름성경학교)’ 를 개최한 것이다. 이는 1923년 주일학교 교장이 었던 박동완이 시작한 것이다. 이 성경학교는 매 일 평균 출석 학생이 200명에 달할 정도로 매우 성공적이었다. 이를 효시로 하여 타 교단을 막론 하고 다음 해부터 경쟁적으로 여름성경학교를 개 최하였다. 박동완은 양반관료 가문 출신답게 능통한 한문 과 우수한 한글실력으로 비록 나라는 망하였으나 언론활동을 통해 자신의 재능을 나름대로 풀어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일제의 통제와 감시 속에 서 민 족 의 독 립 에 대 하 여 제 대 로 된 글 을 쓸 수 없 게 된 상황에서 결국은 붓을 꺾고 행동 즉,독립운 동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만약 당시가 태평 성대의 조선시대였다면 그는 양반관료로서의 삶 을 충실히 살았을 것이고 국가에 불의가 있다면 이에 맞서 상소로 강직하게 맞섰을 것이다. 박동 완은 이제 그의 삶에 있어 중심축을 언론활동에 서 독립운동으로 바꾸게 되었다. 이와 함께 그의 삶도 격랑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그의 운명 뿐 아니라 그의 가족도 고난 한가운데 놓이게 되었 다. 이것은 조선민족의 거족적 봉기였던 3·1독립 운동에,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언론인으로는 유 일하게참여함으로극적으로시작되었다. 3·1독립운동 전, 박동완은 정동제일교회 본처 전도사로 시무하면서, <기독신보>의 주필 겸 편 집인으로 근무하였다. 그는 영어를 비롯하여, 중 국어, 일어에도 능통하였기에 1919년 1월 상순경 대판매일신문을 보고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알 게 되어 이것을 계기로 조선독립에 대한 의지를 표현하고자 하였다. 그는 언론인으로서 다양한 인 맥 을 형 성 할 수 있 었 으 며 조 선 중 앙 Y M CA 위 원으로 활발한 사회활동을 전개해 나갔기에 YM CA 간사였던 박희도와도 자연스레 친분이 있었 다. 1919년 2월 20일 그의 사무실을 방문한 박희 도에게 “조선도 민족자결에 의해 독립하는 것이 좋겠다”는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이를 계기로 박 동완은 1919년 2월 27일에 박희도로부터 이전에 말하였던 계획을 실제로 착수함에 있어 당일 이 필주의 집에서 회의가 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박동완은 단순히 박희도의 권유에 의하여 민족대 표가 된 것이 아니라 진작부터 조선독립에 대한 의식이 확고하였으며,자신의 생각을 박희도에게 먼저 표명함으로써 민족대표로 선정될 수 있었 다. 따라서 그는 정동제일교회 담임 이필주 목사 사택에서 있었던 기독교계 민족대표 회의에 참석 할 수 있었다. 그 날 회의에는 박희도, 최성모, 함 태영,정춘수,이갑성등이참여하였다. 구체적인 의논은 되지 않았으나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여 각지에 배포하여 조선민족의 독립에 대 한 의견을 널리 발표하기로 결의하였다. 일부 문 서는 초본이기에 보지 않았고 문서가 완성되면 날인하는 것을 승낙하고 함태영에게 도장을 맡겼 다. 3·1독립운동 거사의 핵심적, 구체적 내용은 3 3인 중에서도 핵심부만이 알고 있었으며, 기밀유 지를 위하여 상세한 내용을 알려고 애쓰지 않았 다. 이것은 일제 당국에 발각될 경우 내용이 탄로 되어 일을 그르치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박동완 등은 구체적인 내용도 잘 알지 못하였지만 민족 의 독립이라는 목적을 향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인장을 맡긴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자신의 목숨 을 내놓는 백지수표에 날인한 것과 같다. 그는 다 음 날인 2월 28일 오후 8시경 손병희 선생의 자택 에 모여 다른 민족대표와 함께 독립선언서 반포 식에 대한 일정을 논의하였다. 원래는 파고다공 원에서 하려고 하였으나 군중에 의한 소요사태가 우려되어 명월관 지점(태화관)으로 장소를 변경 하였다. 그리고 독립선언서가 2만매 인쇄되었으 며 각지에 배포되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이로 써 그는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1인으로서 본격적 인독립운동을시작하였다. 3.1독립운동당시유관순열사는정동제일교회에 출석하고있었으며,박동완은정동제일교회의주일 학교장이었다. 따라서 박동완은 유관순 열사가 기 독교 신앙을 토대로 한 독립정신을 기르는 데 있어 서 영향을 미쳤다.또한 박동완은 1919년 3월 1일 경 성기독교청년회관 앞에서 기독교인 김재형에게 경 고문 500매를 주었고 김재형은 이것을 가지고 연기 군으로 귀향하였다.이 경고문에 의해 충청도 연기, 청주,보은의만세운동이일어나게되었다. 박동완이3·1독립운동에참여하는데있어서그 의 의지가 어떠하였는지 다음의 신문조서를 통하 여 확인할 수 있다.아래는 1919년 8월 26일 고등법원 예심계 조선총독부 판사 남상장(楠常藏)의 신문에 대한 박동완의 기개 있는 답변이다. 문: 피고는 이러한 운동 방법을 실행하면 어떻게 해서 독립이 된다고 생각 했는가. 답: 자기의 나라를 자기가 다스려 가는 것이 민 족자결이라고생각한다. 문: 선언서를 발표하는 것이 피고의 소위 민족 자결에해당한다는의사가아닌가. 답:아니다.그렇지는않다. 문: 독립한다는 의사를 발표하는 것이 민족자 결이라고생각하지않았는가. 답: 나는 조선민족이 독립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독립시키고, 그렇게 승인 받 는 것이 민족자결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나는 독립하는 것이 민족자결이 아니라 독립을 하면 그것이민족자결이되는것으로생각하고있다. 문: 요컨대 열국의 힘을 빌려서 일본을 움직여 조선의독립을기도한다는취지가아닌가. 답:그렇지는않다. 문: 그러면 미국 대통령 또는 열국 대표자에게 청원서를보낼필요는없지않은가. 답: 그것은 단순히 열국에게 조선이 독립을 선 언했다는것을알리는통고에지나지않는다. 문: 그러면 독립을 선언하기만 하면 벌써 독립 한것이되는가. 답:그렇다. 문: 그러면 3월 1일로써 조선은 독립되었고 자 주민이되었다는것인가. 답:그렇다. 문: 그렇다면 피고의 민족자결은 그것을 말하 는것이아닌가. 답:나는 그런 식으로 하여 독립하고,그리고 뒤 에 우리들이 우리들의 나라의 정치를 하는 것이 민족자결이라고생각하고있다. 문: 독립선언서는 이것인가. 영 제 330호의 3을 보이다. 답:그렇다. 문:이것을발표한취지는무엇인가. 답:우리들이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의백성이 되 었다.그런생각을하고있으라는의미인것이다. 문: 다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라는 것이 아니 고 조선민족일동이 분기하여 독립의 의 사를 발 휘하라는의미가아닌가. 답: 분기하라는 의미를 쓴 것은 아니라고 생각 하는데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의사를 발표하기 위하여분기할것이라고생각한다. 문: 피고가 말하는 그런 것이 아니고 최후의 1 인,최후의 1각까지 분기하여 일본의 정치에 반항 하라는의미가아닌가. 답: 조선민족으로서는 그만한 각오가 없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일본의 정치에 반항하라는 의미는아닐것으로생각한다. 문: 이와 같이 불온 과격한 문구를 적은 문서 (선언서)를 발표한다면 그것에 자극되어 조선인 들이 폭동을 일으키는 일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 는데 피고도 그런 일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 었던것은아닌가. 답:아니다.결코그런생각은하지않았었다.나 는과격한문구라고도생각하지않는다. ▶다음호에계속 /박성호명예기자(함양박씨구소명종친회) 3·1운동100주년특집 근곡 박동완의 생애와 기독교 민족운동 선조 유지를찾아븣 1.박동완선생초기의삶(1885-1915) 근곡박동완태극기그림 경 기포천청성공원내기미독립선언서비,포천시는박동완선생의기념사업을펼치고있다. 박동완선생이다닌배재학당 정동제일교회 박동완선생이입사한기독신보 2.국내민족운동활동(1915-1928) 박동완의3·1운동재판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