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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2월28일 목요일 12 (제146호) 기획 창간 12주년을 맞아 훌륭한 성인의 어머니와 외손을 소개하면서 지난 달 퇴계 선생의 어머니 춘천 박씨를 소개한바 있다. 이번호에는 조선 세조 때 성리학적 정치질서를 확립하려 했던 조선 초기의 문신 점 필재 김 종직 선생과어머니밀양박씨를 점필재공이 지은행장을 곁들여 소개해본다. 선비(先 삽)박영인(朴令人)행장(行狀)(국역) 부인(夫人) 밀양박씨(密陽朴氏)는 밀성대군 후 12중조의 한분이신 영동정공의 후예인 중직대 부(中直大夫) 사재감정(司宰監正) 諱 홍신(弘 信)의 딸이다. 증왕부(曾\王父) 諱 인기(仁杞)는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에 추증 되었고, 왕 부 諱 천경(天卿)은 고려조 삼사좌윤(三司左尹) 을 行하고 조선조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추증 되 었다.비( 삽)여흥민씨(驪興閔氏)는삼사좌윤(三 司左尹) 諱 위(暐)의 가운데 딸이며, 고려 때 판 도판서(版圖判書)에 추증된 諱 일천(日阡)의 증 손이다. 건문(建文) 2년 경진년(1400,정종2)에 부인이 밀양의 지동리(池洞里) 집에서 태어났는 데, 딸이 하나인 관계로 부모 및 왕모(王母)인 정 부인(貞夫人) 위씨(魏氏)의 사랑을 독차지하였 다. 그러다가 영락(永樂) 14년 병신년(1416, 태종 16)에 민 부인이 작고하자, 부인은 그때 나이 17 세로 예제(禮制)에 지나치도록 너무 슬퍼하다가 이로 인해 병을 얻어 위독하게 되었으므로, 감정 공이매우힘써치료하여마침내병이나았다. 그 후 감정공은 서천리(西天里)에 재취(再娶) 하였으나 금실이 좋지 않았고, 또 벼슬살이 때문 에 서울로 가버렸다. 그러자 부인은 외조모(外祖 母) 손부인(孫夫人)에게 의탁하여 살았는데, 서 모(庶母) 소련(小蓮)이 항상 부인을 보호해 준 가운데 이따금 서천(西天)으로 가서 계모(繼母) 를찾아뵙기도하였다. 기해년(1419년) 6월에 감정공이 좌군지병마사 (左軍知兵馬使)로 대마도의 토벌에 종군했다가 이로군(尼老郡)에서 전몰(戰沒)하자, 그 다음해 에 손 부인이 감정공이 무예(武藝)로 등용되어 이역(異域)에서 죽은 것을 대단히 가슴 아프게 여긴 나머지, 유자(儒者)의 행의(行義)가 있는 사람을 사위로 삼고자 하여 마침내 부인을 우리 先公(강호 김숙자)에게 시집보냈다. 또 다음해에 선공이 성균학유(成均學{諭)가 되어 서울로 가 자 부인도 따라갔는데, 계묘년(1423년)에 선공이 출처(出妻)의 아비인 한변(韓變)의 무함에 의해 파직되자,마침내함께고향으로돌아왔다. 신해년(1431년) 가을에는 선공이 고비(考삽) 의 상(喪)을 당하여 여묘살이를 하였고, 상을 마 친 때로부터 2년 뒤인 을묘년에 선공이 부름을 받 고서울에올라가학록(學錄)이되었다. 그 후 20년 동안 중외(中外)의 관직을 역임할 적에 부인은 반드시 세 아들과 두 딸을 데리고 따 라다녔다. 경태(景泰) 4년(1453,단종1)에는 선공이 성균 사예(成均司藝)로 있다가 성주교수(星州敎授) 로 나갔는데 부인은 밀양에 있었고, 막내딸의 혼 례를 마치고 나서는 선공 또한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있었다. 병자년(1455년, 세조1)에는 우리 백형(伯兄, 김종석)이 과거에 급제하여 미처 돌아와서 뵙기 도 전에 3월 2일로 선공이 작고하였다. 선공의 담 제( 딨祭)를 마친 그 다음해인 기묘년(1459년)에 는 종 직 또 한 과 거 에 급 제 하 여 이 해 1 0 월 에 우 리 두 형제가 함께 조정에 하직 인사를 올리고 정위 (庭쭘,부모가 계신 곳)로 돌아와서 영연(榮宴)을 열어드렸다. 이 때 선공에게는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중 직대부(中直大夫)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 이 추증되었고, 부인 또한 영인(令人)에 올려 봉 해졌다. 영연을 열던 날에 미쳐 먼저 선롱(先壟) 에 분황(焚黃)하고, 이어서 부인을 판여(板輿)에 모시고 우리 두 형제가 앞에서 길을 인도하였는 데 이 때 부사(府使) 강숙경(姜叔卿)과 청도군수 이약동(李約東), 영산 현감(靈山縣監) 최계동 (崔繼潼), 교수관(敎授官) 유효담(柳孝潭)이 공 당(公堂)에다 영연의 자리를 크게 설치하고 친히 술잔을 받들고 들어와서 부인께 축수를 드리니 온고을사람들이모두영화롭게여겼다. 성화(成化)6년 경인년(1470,성종1)은 바로 금 상(今上)이 즉위한 해인데 종직이 외람되이 경악 (經幄)에서 상을 모시다가, 이때 부인의 나이 71 세가 되었는지라 사직하고 돌아가서 부인을 봉양 할것을요청하였다. 그러자 상이 특명으로 함양군수(咸陽郡守)를 제수하였다. 병신년에는 종직이 조정에 들어가서 지승문원 사(知承文院事)가 되었다가 또 돌아가서 부인 봉 양할 것을 요청하자 상이 명하여 선산도호부사 (善山都護府使)를 제수하였는데 두 번 다 부 임 (赴任)한 곳으로 부인을 맞아다가 봉양하도록 윤 허하였다. 그런데 선산은 바로 우리 향관(鄕貫) 이라서 선조(先祖)와 선공이 살았던 집이 성서 (城西)와 밀접해 있었으니 여기가 실로 부인께서 옛날 선영에게 제사를 받들었던 곳이다. 그리고 강씨(康氏) 가문에 출가한 자씨(姉氏, 누이)도 여기에 산 지 30년이 되었는데 원림(園林)과 당 실(堂室)이 완연히 옛날과 같았다. 그래서 부인 은 매양 봄, 가을마다 풍일(風日)이 맑고 아름다 울 적이면 자씨 집에 나가 있으면서 후원(後園) 으로걸어가서송죽(松竹)을돌아보곤하였다. 그 리 고 그 이 웃 에 는 본 래 부 터 서 로 좋 게 지 내 던 한 노파가 있어 그 또한 건강하였으므로 반드 시그를초대하여옛날의일을얘기하곤하였다. 자 씨 의 아 들 백 진 (伯 珍 ) 은 정 유 년 에 과 거 에 급 제(함안군수, 사헌부장령, 사간원사간)하였고, 백형의 아들 치(緻) 또한 진사(進士)에 합격하였 으므로 종직이 태수(太守)로서 향중(鄕中)의 부 로(父老) 및 제족(諸族)의 부인(婦人)들을 모아 놓고 크게 풍악을 베풀어 영연(榮宴)을 벌이니 구경하는 사람이 마치 담장을 친 것처럼 매우 많 았다. 그로부터 3년 뒤인 기해년 10월에 부인이 병으 로 누워 오래도록 낫지 않으므로, 중형(仲兄)은 청송(靑松)으로부터 와서 모시었고, 치(緻) 또한 거창(居昌)으로부터 왔다. 이 때 막냇누이는 밀 양(密陽)에 있었는데 부인께서 막냇누이를 더욱 불쌍히 여겨 사랑하였으므로 종직이 누이가 만일 와서 부인을 뵈면 기쁨으로 인해 병이 나을 수 있 으리라 희망하는 뜻에서 사람을 보내 누이를 맞 아왔다.그래서 5인이 함께 모였는데 마침내 12월 21일에 공아(公衙)의 중당(中堂)에서 작고하시 니,향년이80세였다. 이달 28일에 애자(哀子)들이 널[柩]을 받들고 밀양으로 돌아와서 경자년 정월 3일에 지동(池 洞)의 분저곡(粉底谷)에 초빈을 했다가,3월 17일 에선공및민부인의두산소사이에장사지냈다. 부인은 어려서부터 지극한 성품이 있어 모든 옷 짓고 음식 만드는 일들에 대해서 애써 가르쳐 줌을받지않고스스로익히었다. 감정공이 빈객(貧客)을 좋아하여 밤낮으로 빈 객이 문에 그득했고, 또 백부(伯父)인 절제공은 누차 대진(大鎭)의 장수가 되어 계속하여 와서 위 부인을 뵈었으므로 거기(車騎)가 매우 성대하 였다. 그때마다 부인께서 손수 음식을 준비하여 대접하였는데 음식이 정갈하고 풍후하지 않은 것 이 없었다. 기해년 7월에 동정원수(東征元帥) 장 천군(長川君) 이종무(李從茂)가 군사를 거느리 고 돌아오면서 지동(池洞)의 앞길을 지나자 부인 이 울타리 안에서 부르짖어 통곡하면서 여종[女 僕]으로 하여금 길옆에 나가 서서 부인의 아버지 는 어디에 계시는가를 물어 보게 하였다. 그러자 장천군이 말고삐를 당기고 서서 길게 탄식하다가 옷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가면서 말하기를 “나의 죄가 아니라 여러 장수들이 함부로 진격한 때문 이니 원컨대 낭자(娘子)는 나를 허물하지 마시 오.”하였다.그러자 길가는 사람들과 이웃 사람들 이모두그광경을보고눈물을뿌리며울었다. 부인이 우리 가문에 시집와서는 공순하고 겸손 하며 어른들의 명을 잘 받들어서 친정에서 하던 효도를 시부모에게 옮겨 행하였으므로, 우리 왕 부(王父) 진사공(進士公)과 유부인(兪夫人)이 부인을 공경하고 중히 여기어 매양 남들에게 ‘우 리 효부(孝婦)’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선공이 봉 엄(鳳嚴)에서 여묘(廬墓)살이를 할 적에는 삭망 (朔望)때마다 부인이 친히 제수(祭羞)를 준비하 여 가서 분묘(墳墓)에 전(奠)드리는 일을 돕고 절하고 엎드려 호곡(號哭)하였는데 소상(小祥) 과대상(大祥)에도한결같이하였다. 先 公 이 서 울 에 서 벼 슬 할 적 에 는 벼 슬 은 낮 고 녹봉은 박한데다 시골집 또한 멀어서 생활비가 제때에 이르지 않아 조석(朝夕)거리가 항상 떨어 지곤 하였는데 그때마다 부인이 이웃에서 양식을 꾸어다가 조석 끼니를 공급하면서도 선공에게는 그 사실을 모르게 하였다.그리고 선공은 가묘(家 廟)의 사시(四時), 속절(俗節), 기일(忌日)의 제 사(祭祀)와 삭망(朔望)의 참알(參謁) 때에는 반 드시 가례(家禮)를 상고해서 하였고, 그 찬구(饌 具)는 이천(伊川)의 법식을 사용하였는데 비록 객지에 우거하고 있을 적에도 또한 조금도 소홀 히 함 이 없 었 다 . 부 인 은 그 때 마 다 반 드 시 힘 을 다 해 마련하여 한 가지도 빠진 것이 없게 하였다.부 인이 만년(晩年)에는 시골에 살면서 친척 중에 나이 많은 여러 부인들과 서로 왕래하면서 맛있 는 음식 한 가지만 있으면 반드시 나누어 먹고 조 그마한 잔치라도 있으면 반드시 초대하였다. 그 리고 미천(微賤)한 사람들이 문안드리고 물품을 가져올 경우에는 비록 채소나 과일 따위일지라도 반드시 그에 대한 보답을 하되 오는 것은 간략하 게받고보내는것은많이주어돌려보냈다. 先 公 이 작 고 한 이 후 에 는 집 뒤 정 원 의 깨 끗 한 곳에 당(堂)을 마련하고 삼신(三神), 오제(五帝) 에게 배례(拜禮)를 했는데 그 첫날에는 두 차례 로 정해서 했다가 뒤에는 세 차례로 하였다. 그리 하여 아무리 춥고 더운 때나 큰비가 오고 큰 눈이 내리는 날일지라도 빠뜨리지 않았으므로 고(孤) 등이 풍한(風寒)을 쐬어 건강을 해치게 될까 염 려하여 그리 못하시게 간(諫)하여도 듣지 않았 고, 간혹 노비(老婢)를 통해서 넌지시 뜻을 말씀 드리고 이따금 눈물을 흘리면서 간하기도 하였으 나듣지않았다. 그러다가 병이 위독해짐에 미쳐서는 일어나 배 례를 할 수가 없자 탄식하며 이르기를 “내가 배례 를빠뜨리는것이아닌가.”라고하였다. 일찍이 종직에게 이르기를, “네가 전성(專城) 으로 나를 봉양하게 된 것은 주상(主上)의 은혜 이다. 그러나 다만 고원(故園)은 항상 마음속에 있으니 어느 날인들 잊을 수 있겠느냐.”고 하였 다. 그래서 종직이 마침내 노복들을 시켜 시골집 을 수리하게 하고 명년에는 벼슬을 그만두고 내 의(萊衣)를 입고서 향리(鄕里)로 돌아가 어머니 의 평소의 회포를 이루어 드리려고 꾀하였는데 이 뜻 을 미 처 이 루 지 못 한 채 겨 우 세 시 (歲 時 )를 격해서 이 크나큰 참혹한 일을 당했으니 저 푸른 하늘이여어찌이한이다함이있으리오. 평생 동안 뜻 받드는 일에는 이미 부끄러운 점 이 있거니와 재력(財力) 또한 부족하여 초상 장 사의 예도 의식대로 하지 못한 것이 많았고 뛰어 난 행실과 훌륭한 덕 또한 만분의 일이나마 칭도 해서 후인(後人)들에게 일깨워 주지 못하고 있으 니고(孤)의죄악이큰것이다. 아무리 천지에 슬피 하소연한들 어떻게 죄악에 서도피할수있겠는가.아,슬프다.(김종직著) 본관은 밀성(밀양,密陽). 할아버지는 봉의의좌 (奉醫醫佐) 박인기(朴仁杞)이고, 아버지는 삼사 좌윤(三司左尹) 박천경(朴天卿)이며, 어머니는 검교군기감수녕(檢校軍器監收寧) 위윤경(魏允 敬)의딸이다. 나면서부터 기골이 남달랐다. 형인 박사자(朴 獅子)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으나 요절 하였으므로 부모가 경서와 『사기(史記)』를 읽히 지 않 았 다 . 1 2 세 에 능 히 활 을 잘 쏘 고 , 장 성 하 여 검교중랑장이 되었다. 산원(散員)에 올라 서경도 원수의 휘하에 예속되었다. 1384년(우왕 10)에 별장이 되었으나 형인 절제사(節制使) 박언충 (朴彦忠)과함께향리에돌아왔다. 조 선 이 건 국 되 자 무 예 로 서 갑 사 (甲 士)가 되 어 금군에 소속되었는데,사직(司直)을 거쳐 호군(護 軍)에 오르고, 1414년(태종 14)에 제물량(濟物梁) ·병산포(竝山浦)의 만호 등을 역임하고, 행직(行 職)으로 3군진무(三軍鎭撫)가 되어, 1418년에 중 직대부(中直大夫) 사재감정(司宰監正)이 되었다 가,그다음해에좌사금(左司禁)이되었다. 1419년(세종1)에이종무(李從茂)등으로하여 금 군사 1만 7000여 인과 전함 220여 척을 3군으 로 나누어 거느리고 대마도를 토벌하게 하였다. 이때에 대신들이 박홍신이 다시 수군을 거느리면 바다 길을 잘 안다고 아뢰어, 좌군병마사가 되어 절도사 박실(朴實)에 예속되었다. 형 박언충도 중군병마사로서 함께 종군하였다.대마도에 이르 러이로군(尼老郡)싸움에서전사하였다. 점필재( 탕畢齋) 김종직(金宗直) 선생은 1431 (세종 13)∼1492(성종 23)년 간에 생존했던 인물 로 조선 성리학의 종사(宗師)였다. 본관은 선산 (善山), 자는 효관(孝꿍)·계온(季종), 호는 점필 재이다. 아버지는 사예(司藝) 김숙자(金叔滋)이 고,어머니는 밀양박씨로 사재감정(司宰監正)박 홍신(朴弘信)의따님이다. 점필재의 아버지 김숙자의 자는 자배(子培), 호는 강호(江湖)이다. 선산 출신으로 증조부는 김광위(金光偉), 조부는 김은유(金恩宥), 부는 김관(金琯)이다. 어머니는 유인귀(兪仁貴)의 따 님이다. 강호선생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와 야은(冶隱) 길재(吉再)를 이어 조선 성리학의 학통을 아들 점필재에게 전수(傳授)하였다. 점필 재의 어머니는 밀양박씨이다. 『점필재집( 탕畢齋 集)』,「이준록( 총尊錄)」에 의하면,점필재의 어머 니는 중직대부(中直大夫) 사재감정 휘 홍신(弘 信)과 여흥민씨(驪興閔氏) 부인의 사이에서 태 어났다. 감정공(監正公)이 젊었을 때 형 언충(彦 忠)과 함께 무재(武材)로 명성이 높아 태종(太 宗)에게 알아줌을 받았다. 세종(世宗)이 즉위한 원년 6월에 군대를 움직여 대마도(對馬島)를 토 벌할 적에 공이 좌군지병마사(左軍知兵馬使)로 제일 먼저 적진에 돌격하여 진중(陣中)에서 전사 하였다. 감정공에게는 아들이 없고 따님만 있었 다.이따님이바로강호선생의부인이다. 점필재는 밀양에서 태어나 6세때부터 아버지 강호선생에게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였다.기초학 문을 두루 배운 다음 『소학(小學)』과 『효경(孝 經)』을 학습했다. 이어서 사서오경과 제자백가를 두루 배웠다. 그리고 활쏘기 글씨쓰기 등의 과목 도 함께 배웠다. 또한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수업을 받았다. 점필재는 경 학(經學)을 철저히 익히고 시문 공부 또한 게을 리 하 지 않 아 1 2 세 에 이 미 시 로 써 명 성 을 떨 치 기 시작하였다. 점필재는 29세가 되는 1459년(세조5) 문과(文 科)에 합격한 후 중앙 관직에 진출하여 교리(校 理) 경상도병마평사(慶尙道兵馬評事) 등을 지냈 다. 학문을 좋아하는 성종(成宗)이 즉위하자 왕 은 학문과 문장이 뛰어난 점필재를 총애하여 경 연관으로 삼았다. 성종이 점필재를 중용한 이유 중에는 훈구공신들의 국정 전횡을 견제하기 위함 도 있었다. 이후 점필재는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 해 지방관을 자처하여 함양군수(咸陽郡守)로 나 갔다. 이후 중앙과 지방을 오가며 여러 벼슬을 하 다가 형조판서(刑曹判書)를 끝으로 관직생활을 마쳤다. 점필재의 학문과 문장은 당대 지식인들의 표상 이 되어 영재들이 문하에 운집했다. 김굉필(金宏 弼)·정여창(鄭汝昌)·김일손(金馹孫)·유호인(兪 好仁)·남효온(南孝溫)·조위(曺偉)·김맹성(金孟 性)·이종준(李宗準)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제자들 중 일부는 조정에 출사하여 주로 사헌부· 사간원·홍문관에 진출하여 훈구공신들의 전횡을 탄핵하고 개혁을 추구했다. 점필재가 처음 관직 에 나갔을 때는 훈구파들이 국정을 완전히 장악 하고 있었다.이 상황에서 점필재도 큰 힘을 쓸 수 없었다. 그래서 점필재는 제자들을 과거를 통하 여 등용시켜 사림의 원기를 육성하였다. 그러나 훈구대신들의 견제가 여전히 강력하여 점필재의 정치적 역량을 모두 펴는 데는 곤란이 따랐다. 59 세에 이르러 병으로 사직을 청하고 고향인 밀양 으로 돌아와 사방에서 모여드는 학자들을 가르치 다가62세를일기로타계하였다. 연산군이 등극하자 훈구파는 자신들을 공격하 는 사림파의 신진관료들을 제거하기로 작정하였 다.그래서 일어난 것이 무오사화(戊午士禍)이다. 무오사화는 유자광(柳子光)이 점필재가 청년시 절에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점필재의 제 자 김일손이 성종실록의 사초에 올림으로부터 시 발되었다. 유자광은「조의제문」속에 등장하는 초 나라 의제(義帝)를 단종에 비유하고,의제를 죽인 항우(項羽)를 세조에 비유하여 지은 글이라고 하 면서 점필재가 선왕에게 역심을 품었다고 모함했 다. 이 여세를 몰아 연산군과 훈구대신들은 직언 으로 연산군과 훈구파의 비리를 공격했던 점필재 제자들을 대거 숙청하고 점필재는 부관참시하였 다. 사실 「조의제문」은 점필재가 어린 시절 과거 시험 답안 공부를 할 때 연습 삼아 느낀 점을 서술 한 것뿐이다. 이에 대해서는 경성대 정경주(鄭景 柱)교수의 「점필재 김종직의 조의제문과 출처 논 란에 대하여」에 자세히 밝혀져 있다. 이 논문에서 는「조의제문」이세조를비난한목적으로쓴글이 아님에도지금까지도 그렇게 인식되게 한것은 유 자광의 곡해 때문이라고 보았다. 비록「조의제문」 이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난한 글이 아니라고 해 도 점필재의 위대성은 변함이 없다. 그가 불리한 훈구파의견제를뚫고 조선에 성리학이 전파될 수 있도록하였으며,또한애민사상과 인문정신이 조 선에 활착되도록 하는데 큰 기여를 한 것은 명백 한 사실이다.점필재의 제자인 김굉필과 정여창은 문묘(文廟)에 배향되었지만, 정작 점필재 자신은 문묘에배향되지못한 이유는 바로유자광이 쳐놓 은 ‘역(逆)’이라는 그 그물 때문이었다. 점필재의 제자들은 갑자사화(甲子士禍)에 또다시 참화를 입었다.이로써 점필재의 직전제자들은 대부분 화 를 당하였고, 게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신 원은 되었지만 ‘역심을 품었다’는 낙인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있어 세상으로부터 꺼림을 당하는 바 되었다.그래서 점필재는 조선 성리학의 순교자이 면서 조선 사림의 종장(宗匠)임에도 그 업적을 제 대로평가받지못하는결과를초래하였다. 저서는 무오사화 때 모두 소실되었는데, 일부 분을 수습한 것이 지금의 『점필재집( 탕畢齋集)』 이다. 그밖에 『유두유록(遊頭流錄)』·『청구풍아 (靑丘風雅)』·『당후일기(堂後日記)』 등의 저서가 있다. 편저로는 『일선지(一善誌)』·『이존록( 총尊 錄)』·『동국여지승람』 등이 전해지고 있다. 무오 사화 때 많은 저술들이 소실된 탓에 점필재의 학 문세계를 완벽히 이해하기는 어려운 실정에 있 다. 밀양의 예림서원(藝林書院), 선산의 금오서 원(金烏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柏淵書院), 김천 의 경렴서원(景濂書院), 개령의 덕림서원(德林 書院) 등에 제향 되었다. 본래의 시호는 문충(文 忠)이었는데, 유자광 등의 훈구대신들이 반대하 여 문간(文簡)으로 정해졌다가 200년이 지난 숙 종 때 다시 본래의 시호인 문충(文忠)으로 복원 되었다.[글·김기(金己)박사] /자료제공박권곤(영동정공파대종회간사) 점필재김종직선생의어머니밀양박 씨 선조 유지를찾아븣 김종직선생의생가.경남밀양시부북면제대리. 정 부인밀양박씨묘.제대리생가건너선산김씨선영. 점필재김종직존영. 생애및활동사항 ■사재감정박홍신 ■점필재김종직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