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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1월31일 목요일 7 (제145호) 기 획 헌강왕 치세와 효종을 둘러싼 사단 이면엔, 외려 숨기고 싶 은, 또는 의도하는 뭔가 감춰져 있음이 드러난다. 미장부, 화랑 도의 전횡으로 정사가 혼란해지고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난맥상을돌파하려면뭔가의사단이필요했다. 화랑 효종은 반대 여론을 무마하려면 자신들의 선행을 선전 하는, 예컨대 지은 구휼과 같은 구설수에 오를 사건이 절실했 다고 볼 수밖에 없다. 여왕, 낭도, 효종, 인경 등이 하나같이 선 행의 주체로 나타난 것도 그렇거니와,그 과정의 일사불란함도 사전 각본의 엄밀한 전개 같은 느낌을 준다. 이에 대한 지적이 있다. 효종랑이든그 부모든진성여왕이든모두마찬가지다. 백성들을곤궁에 빠뜨린당사자들이 오히려지은을통해무슨선행이나한 것처럼생색내는 게꼴 보기싫다. 이건자기생색용 내지민심수습용, 또는정국돌파용 정 치적이벤트에지나지않는다. 이 이야기를들은당시백성들의심정이 과 연 어땠을까. 그리고 이게 무슨 대단한 사연이라고 당나라에 표문 表文까 지보내그미담을알렸을까.‘나도이렇게선정하고있다.’고알리려는뜻 아닌가. (한규무,븮뒤집어본 인물열전븯,시공사,2004,p. 93) 지은 구휼은 어디까지나 국면 전환용 ‘깜짝 쇼’에 불과한 것 이었다.화랑 출신 경문왕의 ‘당나귀 설화’가 여론에 대한 무형 의 억제였다면, 진성여왕과 화랑 효종의 ‘거인 구금’은 유형의 물리적 탄압이다.또 화랑이 주체로 등장한 ‘지은 구휼’은 여론 의회유가된다.이세사건에는모두화랑이관련돼있다. 화랑도 무리는 처음부터 갈등과 불화의 온상이었으며, 국가 권력을 좀먹는 반관반민적인 단체였다.그들은 항용 먼저 귀족 의 사적인 힘 아래 속했으며, 그 다음으로 국가에 속했다.그리 고 그들은 그것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우리가 아는 바 와 달리 통일 전쟁에서도 화랑도 무리의 역할은 일개 소모적 존재에불과했을뿐이다. 당시의 화랑도는 신라군의 전략을 기획하는 핵심이나 근간이 아니라, 전황이 불리해지면 언제나 전의를 북돋우기 위해 희생되어질 수 있는, ‘자 살특공대’와 같은 일개 소모적인 존재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던가 짐작된 다.(박순교 븮김춘추의집권과정연구븯경북대대학원박사학위논문,1999, p.227) 진평왕대 ‘죽음’과 ‘연좌’로 이어지는 화랑도와 비화랑도 집단 간의 극 한 대립을 위에서 보았다. 그런데 집단 간의 대립뿐만 아니라, 집단 내의 대립역시나타나고있었다. 화랑도내에서일어난 대립이 그것이다. 다아 는 바와 같이 화랑도는 출발 자체부터 갈등과 싸움을 안고 싹 턴 터였다. 화랑도가 일사불란한 체제를 갖춘 하나의 조직체가 아닌 이상, 각기 낭도 를 거느린 화랑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으며, 나아가 그러한 차이는권력을둘러싼 세력다툼이나파벌싸움으로 이어졌을가 능성이 크다. (박순교 븮김춘추의 집권과정 연구븯 경북대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1999,p.24) 그간 화랑도는 삼국통일의 주역이라는 등, 철저히 미화되어 왔다.이에 대한 환상과 집착을 버려야만 화랑도의 진상을 바라 볼 수 있다. 통일은 당이라고 하는 국제 세력을 역이용하여 성 취한것으로서외교의소산이지,화랑정신의결과물이아니다. 억제-탄압-회유로 이어진 변전은 화랑 세력이 빚은 실정失 政으로 광범위한 반발 세력이 형성되어,억제와 탄압만으로 더 이상 민심을 수습할 수 없다는 절박한 위기감의 대응이라 해석 할수밖에없다.그핵심에효종이있었다고짐작된다. 이후 여왕은 선행의 일을 핑계로 효종의 덕을 한 차례 찬양 했다. 그 다음, 헌강왕의 딸과 결혼시켰다. 화랑으로서 왕의 사 위 가 된 예 는 드 물 기 는 하 지 만 전 혀 없 지 도 않 았 다 . 진 평 왕 의 사위가 된 용춘, 헌안왕의 사위가 된 응렴 등이 있었고, 그 중 응렴은왕위를잇기도했었다. 하지만 화랑 효종이 진성여왕의 배려로 요의 여동생과 결혼 한 것은 전왕 헌강왕의 아들 요가 여왕의 후계자로 즉위했던 점에서,또 여왕자신의아들이있은 점등에서,흔히논자들사 이에서심심찮게거론되는후계자의의미는아니었다. 여왕은 효종을 요의 제부로 삼음으로써 요의 정치적 후원자 가 되게 하려한 의도가 있었다고 짐작된다. 또한 효종 무리의 조직적이고 막강한 경제력은 당시 진성여왕에게도 십분 고려 됐을 것이다. 가령 효종 무리의 기부 액수가 여왕이 하사한 액 수를몇곱절넘었다는예에서짐작이가능하다. 색공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모정의 목적을 지니고 색(여 자)를 바치는 것을 칭한다. 진성여왕은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위홍과 간통했고, 위홍이 죽은 후부터는 미장부 두세 명을 몰 래 불러들여 음란하게 지냈다.진성여왕이 잠통한 미장부는 도 대체 누구일까? 신라에서 미장한 소년들에 관한 기록이 찾아 진다. 왕이 원래부터 각간 위홍과 간통하고 있었다. 중략…위홍이 죽자 혜성 대왕이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이후로 왕은 젊은 미남자 두세 명을 남몰 래 불러들여 음란하게 지내고, 그들에게 요직을 주어 나라 정사를 맡겼다. 이에 따라 아첨하고 총애를 받는 자들이 방자하여지고, 뇌물을 주는 일이 공공연하게행해졌으며,상벌이 공평하지못하고기강이 문란해졌다. (븮삼 국사기븯권10신라본기10진성여왕2년조) 당나라영고징의븮신라국기븯에는“귀인의자제중에서훌륭한 자를선발 하여곱게 꾸민 다음, 이름을 화랑이라하여 백성들이 모두 떠받들어 섬겼 다.”라고기록되어있다. 更取美貌男子, 粧飾之, 名花郞以奉之…중략… 唐 令狐澄 븮新羅國記븯曰 “擇貴人子弟之美者, 傅粉粧飾之,名曰花郞, 國人皆尊 事之也.”(븮삼국사기븯권4진흥왕37년조) 화랑도와 관련한 기록에서 미모의 남자라는 말이 확인된다. 진성여왕이 잠통 潛通한 대상 역시 미장부로 나타난다. 뭔가 둘 사이엔 연관된 느낌이 든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미 지적 된바에의해서도이러한짐작은사실로드러난다. 동왕 2년 위홍이 졸거한 다음에 2ㆍ3인의 미장부들을 비밀히 측근으로 불러들여그들에게요직을주고국정을맡기기까지하였다고한다.이것은 진성여왕이 화랑세력에의탁하려했던의도로 파악할수있다. 원래경문왕 의가계는화랑세력과 관련이 깊다. 경문왕이 화랑출신이었음을비롯하여 대대로 왕권의 기반은 화랑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배용, 븮신라하대 왕위계승과 진성여왕븯,븮천관우선생환력기념사학논총븯,1985,p.357) 위 견해대로 진성여왕이 화랑 세력과 결탁,또는 잠통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 화랑 세력은 구체적으로 누구라고 할 수 있 을까.진성여왕치세를통틀어화랑은효종만이확인된다. 이처럼 여왕은 자신에게 색공色貢을 제공한 장본인 효종에 게 반대급부를 베풀었던 측면이 강한 듯 보인다. 효종의 결혼 에서 보건대,그는 진성여왕과 밀착된 관계를 이어갔다고 짐작 된다. 한데 그 결과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897년 여왕은 마 침내 열둘을 갓 넘긴 어린 조카에게 양위하기에 이르렀던 상황 이 그 방증이 된다.당시 상황의 피폐함은 최치원이 찬한 븮양위 표븯에서절실히드러난다. “짐이 뒤를이어왕위를지켰으나모든어지러움이 한꺼번에 밀어닥쳤 다. 나라안의강토가난리를만나니겁회(劫灰)를보는것같이 되었다. 사 람 죽이기를 삼베 줄기를 자르듯 함에 내던져진 해골이 풀 더미 마냥쌓였 다.창해의횡류(橫流)는날로 심하고곤강의불길은바람같이 거세다.”(최 치원,〈양위표〉븮동문선븯권43 표전表箋) 길에는 죽은 시체가 풀 더미처럼 쌓였고 유랑하는 백성이 물길마냥떠 돌았다.(최치원,〈양위표〉븮동문선븯권43 표전表箋) 굶어서 죽고 전쟁으로 죽은 시체가 들판에 별처럼 늘어서 있다(최치원, 븮해인사묘길상탑지븯,역주한국고대금석문권3,p.337~345). “지금모든고을이 도적의소굴이 되었고산천은전쟁터가되었다. 어찌 하늘의 재앙이 우리 해동에만 흘러드는가. 몽매한 탓에 도적들을 불러들 이고 말았으니 죄가 주륙(誅戮)을 당해도 싸다. 이치(理致)상 왕위를 버림 이 마땅하다.”(최치원,〈양위표〉븮동문선븯권43 표전表箋) 절망과 울음 섞인 토로는 신라가 이미 누구도 제어할 수 없 는 영역으로 들어섰음을 알려 준다. 결국 진성여왕은 실정을 거듭하다 왕위를 버렸다. 거기에는 화랑 효종 무리의 활동이 개재되어 있었다. 이후 효종은 한참 동안 보이지 않다가, 효공 왕6년에야다시모습을드러낸다. 6년봄 3월,서리가내렸다.대아찬효종을시중에임명했다. 15년왕이 첩에게미혹되어정사를돌보지않았다. 대신은영이 충간하 였으나왕이 듣지않았다. 은영은그 첩을죽여버렸다.(븮삼국사기븯 권12신 라본기12효공왕) 효종은 효공왕의 제부다.처남인 효공왕이 즉위한 지 6년,효 종은 대아찬으로 시중이 되었다. 시중의 역할이 주로 왕명의 출납과 근시인 점에서 효종은 일단 6년 만에 다시 정치 일선에 복귀, 효공왕 최측근을 형성했다고 할 수 있다.왜 효종은 처남 이 즉위했는데도 6년이나 정치적 공백이 있은 것일까. 이것은 그가진성여왕실정을초래한것과무관치않았을것이다. 한데 경휘(신덕왕)역시 효공왕의 제부다.또 효공왕의 정비 가 경휘(신덕왕)의 여동생이므로 효공왕은 경휘의 제부도 된 다. 경휘와 효공왕 둘은 쌍방 간에 처남ㆍ매부를 겸하고 있다. 그내용을간단히도표로정리했다. ※왕위계승및계보도 효공왕은 경휘(신덕왕)에게 제부븡처남이면서 경휘(신덕왕) 역시 효공왕에게 마찬가지다. 경휘(신덕왕)와 효공왕은 중첩 된 혼인으로 맺어져 있다. 뒷날 국인의 지지로 경휘는 즉위까 지 한다. 한데 그간 경휘의 활약은 기록에서 찾을 수 없다. 이 점은작위적조작이아니면불가능하다. 아무튼 효종이 시중이 되고 나서,효공왕은 천첩과의 황음에 빠졌다. 첩과의 사랑은 흔히 있는 일이다. 하지만 왕이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는 점에서 문제는 불거질 수밖에 없다. 효종은 당시 왕을 가까이에서 보좌해야 할 시중에 있었다. 그럼에도 효종은효공왕의실정을직간하거나바로잡지않았다. 효종은 진성여왕의 실정을 초래한 경험이 있다.그런 효종이 왜 시중에 있었으면서 효공왕의 잘못을 바로잡지 않았을까.거 기에는 효공왕의 정비,즉 경휘(신덕왕)일가를 견제하려는 뜻 이 있었다고 보인다. 진성여왕에게 색공을 제공한 장본인이었 던 효종은, 효공왕의 주변에 자신의 세력을 부식하기 위해 천 첩 알선을 직접 담당했을 가능성을 전연 배제할 수 없다. 어쨌 거나 효종은 다시 한 번 효공왕 실정의 핵심으로 깊숙이 관여 했었다는말이된다. 그 결과 효종은 세간에 어떤 인물로 비쳤을까. 그가 화랑으 로 활동한 시기 여왕의 음행이 나타났고, 시중으로 있던 시기 효공왕의 실정이 나타났다. 이쯤 되면 비록 수천의 낭도를 거 느렸다해도그가왕위에오르긴힘들었을거라보인다. 이렇게 보면 효종은 정도보다 궤도를 즐겨 구사한 인물이라 여겨진다. 또 당연한 일이지만, 항상 그 결과는 여론의 지탄과 효종의몰락으로겹겹이이어졌다. 효종은 수천의 낭도를 거느렸고 아비는 서발한과 3재상을 겸하고 있다. 또 문성왕의 직계 혈통이다. 그런 효종이 굳이 여 왕의 색공(色貢)과 효공왕의 색사(色事)에 관여하는 등의 무 리수를 꾀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 해답은 다음 자료에서 찾아 질 수 있 다 . 왕이 흥륜사 중에게 물었다. “대사가 전에 말했던 세 가지 이익이란 무 엇인가?” 중이 대답했다. “언니와 결혼하면 왕과 왕비의 뜻대로 된 것이 라, 왕과 왕비가기뻐하여당신에대한 사랑이 점점깊어진것이 첫째이익 입니다. 이로 인해 왕위를 잇게 된 것이 둘째 이익입니다. 결국 왕위에 올 랐고 처음부터 원한 둘째 딸을 취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셋째 이익입니 다.”왕이 크게웃었다.(븮삼국사기븯권11신라본기11경문왕3년조) 뷺두 딸 중에서 공의 의사대로 결정하도록 하라.뷻 사자가 돌아와서 낭의 의사를왕에게보고했다.뷺첫째공주를받들겠다고합니다.뷻 그 후3개월이 지나자 왕이 병이 들어 위독 하 게 되었다. 여러 신하 들을 불 러놓고 말 했다. 뷺내게는아들이 없으니내죽은뒤의일은마땅히맏딸의남편응렴이 이를 계승해야 할 것이다.뷻 그 이튿날 왕이 세상을 떠나매 유언을 받들어 낭이 왕위에 올랐다. 이에 범교사는 왕에게 나아가 말했다. 뷺제가 말씀 드린 세 가지 아름다운 일이 이제 다 이루어졌습니다. 첫째 공주에게 장가를 드셨 으므로 이제 왕위에 오르신 것이 그 첫째요. 예전에 흠모하시던 둘째공주 에게 이제 쉽사리 장가드실 수 있게 된 것이 그 둘째요, 맏 공주에게 장가 를 드셨으므로 왕과 부인께서 매우 기뻐하심이 그 셋째입니다.뷻 그 말을 고맙게여긴왕은대덕이란벼슬을내리고금1백30냥을하사했다.(븮三國遺 事븯권2기이248대경문왕) 위 기록은 861년경 경문왕 즉위 때다. 맏사위가 왕위를 우선 적으로 잇는다는 원칙이 당시 지배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 면 경휘와 효종,둘 중 누가 맏사위였을까.신라 하대의 왕위계 승 연구에서 탁월한 업적을 보인 김창겸의 지적을 눈여겨볼 필 요가있다. 신덕왕비인의성왕후가 있어 신덕왕의 아버지 예겸이 시중에 재임할 시 기쯤(헌강왕 1-6년)에 출가하였다. 또 이에 비해 계아태후는 훨씬 뒤인 진 성여왕대에 효종랑과 혼인하였다. 그러므로 의성왕후가 손위의 자(姉)이 고 계아태후는 매(妹임)을 추측할 수 있다.(김창겸, 븮신라 하대왕위계승연 구븯,경인문화사,p.86) 왕위 계승상 신덕왕이 보다 더 유리한 조건을 가졌던 것 같다. (김창겸, 븮신라하대왕위계승연구븯,경인문화사,p.86의각주139) 김창겸은 또 왕위 계승 서열에서 경휘가 훨씬 더 유리한 조 건을 가졌으며,그 근거가 헌강왕의 맏사위였던 점에 근거했을 것이란 각주를 달기도 했다. 위 지적처럼 경휘가 맏사위였고 왕위 계승 서열에서 우위를 점했다면, 효종이 갖가지 부패와 비리, 편법에 몰두한 까닭이 자연스레 설명된다. 즉 왕위 계승 서열에서 밀렸던 효종으로선 자연 무리수를 꾀했을 가능성이 크기때문이다. 여기에 또 하나 보탠다면 박경휘가 헌강왕의 맏사위라는 조 건 외 여러 면에서 여론의 지지를 받았던 측면이 있었다고 본 다.왜냐하면 신덕왕의 즉위 당시에도 효종뿐만 아니라 진성여 왕의아들들도있었다. 그럼에도 김씨 세력들이 일제히 왕위 계승에서 배제되고 박 씨 세력이 왕위를 계승하는 과정이 거부감 없이 성사될 수 있 은까닭은무엇일까. 이에 대한 해답으로는,이를테면 일찍이 진성여왕이 벌인 엽 색에 효종이 연관되어 있었고, 여왕의 아들들 역시 어미의 실 정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반증이 아닌가 여겨진다.이들은 모두 후삼국 분립의 단초를 제공한 진성여왕과 직접적 관계에 있었 고,자연여론의거센표적이었을개연성이높다. 그 뿐 아니라 효종은 요(효공왕)가 천첩과의 사랑에 빠져 있 은 911년 당시 시중의 위 位에 있었다( 효공왕 6년에 대아찬 효종이 시중에 임명된 이래 효공왕 내내 시중 교체의 기록은 없다.). 시중은 왕 의 핵심 수족이나 마찬가지다.그러므로 효공왕이 벌인 천첩과 의 애정 행각에도 효종이 깊이 관여했거나, 진성여왕 대의 선 례로보아주선했을가능성마저앞서제기한바있다. 아무튼 효종의 결혼 시점은 김창겸의 말대로 진성여왕대가 확실하다. 효녀 지은은 한기부 백성 연권의 딸이다. 그녀는 천성이 효성스러웠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어머니를 모셨다. 나이 32세가 되어도 시집 을가지않고어머니를보살피기위하여곁을떠나지않았다. …중략… 어 머니가말하기를“나때문에너를종이 되게하였으니차라리빨리죽는편 이 낫겠다.”고하면서소리를내어크게우니딸도따라울어서그 슬픔이 길가는사람들을감동시켰다. 효종랑이 지나가다가그것을보고돌아와서부모에게청하여자기집곡 식 1백 석과 옷가지를 실어다 주었다. 또한 그녀가 몸을 판 사람에게 몸값 을보상해주고양민으로 만들어주었다.이 소식을들은낭도몇천명이 각 각 곡식 1섬 씩을 주었다. 대왕이 이 를 듣고 또한 벼 5백 석과 집 한 채를 하 사하고, 부역을면제하여주었으며, 곡식이 많아서도둑이 들까 염려하여 군사를보내지켜주게하였다. …효종(랑)은당시제삼재상인서발한 인경 의 아들로서 아명은 화달이었다. 왕이 생각하기를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어른스러운 면이 있다고 여겨 즉시 형 헌강왕의 딸을 주어 아내로 삼게 했 다. (븮삼국사기븯권48 열전8 효녀지은) 그렇다면 경휘의 결혼 시점을 따져 보자. 김창겸이 추정한 경휘의 결혼 시점에는 문제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우선 헌 강왕의 아비 응렴(경문왕)은 헌안왕이 죽기 직전인 860년 10 월 결혼했다. 그리고 석 달 뒤 헌안왕의 사위로서 경문왕이 되 었다.이를보여주는사료를들면다음과같다. 4년가을9월,왕이 임해전에여러신하들을모았다.응렴이 열다섯의나 이로 이 자리에 참석하였다. 왕이 “네가 상당 기간 사방을 유력하며 견학 한 바있는데, 착한 사람을본 일이 없었던가?”라고물었다. 중략 왕이 이 르길 “내가 딸이 둘 있는데, 형은 금년에 스물이요, 동생은 열아홉인데 그 대의 마음에 드는 대로 장가를 들라!” 응렴이 사양할 수 없어 일어나 절을 하며 감사의 뜻을 표하고, 곧 집으로 돌아와 부모에게 이 사실을 말했다. 그의부모는“듣건대왕의두딸의얼굴은형이 동생만 못하다고한다. 장 가를 가야 한다면, 동생에게 장가를 드는 것이 좋겠다.”라고 말하였다. 그 러나응렴은결정을내리지못하고주저하다가, 흥륜사중에게물었다. 그 중은“형에게장가를들면세가지이익이 있을것이요,동생에게장가를들 면반대로 세가지손해를볼 것이다”라고대답하였다. 응렴이 곧“제가감 히마음대로 결정을못하겠사오니, 다만 왕의명령에따르겠나이다.”라고 아뢰니,이에왕이 맏딸을시집보냈다. 5년 봄 정월, 왕이 병으로 누워 위독해지자, 측근들에게 말했다. “과인 이 불행하게 아들 없이 딸만 두었다. 우리나라에는 예전에 선덕ㆍ진덕 두 여왕이 있었지만, 이는 암탉이 새벽을 알리는 것과 비슷한 일로써, 이를 본받을 수는 없다. 사위인 응렴은 나이가 비록 어리지만 성숙한 덕성을 갖 추고있다. 그대들이 그를임금으로 세워섬긴다면, 반드시조종의훌륭한 후계자를잃지 않을 것이요, 내가죽은 이후에도 나라에해로운 일이 없을 것이다.” 이 달 29일에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헌안이라하고, 공작지에 장사지냈다.(븮삼국사기븯권11신라본기11헌안왕4년ㆍ5년조) 경문왕은 결혼 직후 즉위했다. 또 그의 치세는 15년이다. 경 문왕이 결혼 직후 자식을 얻었어도 서거 당시, 맏아들 헌강왕 의나이는열다섯을초과할수없다. 최대치로 잡아 헌강왕이 열다섯에 즉위했다고 가정하면, 헌 강왕 치세가 12년이다. 그렇다면 헌강왕의 사망 당시 연령은 2 7살이 된다. 헌강왕이 열다섯에 결혼했고 즉시 자식을 얻었다 고가정해도사망당시맏이는최대12살미만이다. 경휘(신덕왕)가 헌강왕의 맏딸과 결혼했다 할지라도, 맏딸 의 나이를 기준으로 할 때 그의 결혼은,예겸이 시중에 있은 헌 강왕 6년 이전은 어렵고(6살짜리와 결혼했다고 보긴 힘들다) 헌강왕 대 후반,정강왕대 또는 진성여왕 치세 전반이라짐작된다(이에 관한 부분 역시삭제돼남겨진기록이 없다). 한편 효종의 맏이는 김부일 가능성이 높다. 김부가 효종의 세력을 이어 즉위한 점이 특히 그렇다. 김부의 사망이 978년인 점(븮고려사븯 권2세가2경종 3년조), 진성여왕의 치세 등을 고려하면 김부의 향년 나이는 82~91세로 나타난다. 생물학적 근거에서 김부가 장수했다 하더라도 효종의 결혼은 진성여왕 중븡후반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결혼 이후 오랫동안 무자였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 렇다 해도 10년을 넘진 않 을 것이 다.) 결국 박경휘는 왕위계승의 자격을 갖춘 왕족이었을 뿐 아니 라( 이명식, 븮신라말 박씨왕대의 전개와 몰락븯, 븮대구사학븯83, 2006, p.4), 보다 구체적으로는 헌강왕의 맏사위로서, 왕위 계승 서열에서 앞섰다고 보인다. 전왕이 아들이 없을 경우 맏사위가 계위한 경문왕의 예에서 우리는 박경휘의 즉위가 단순한 국인의 추대 에앞서원칙적왕위계승의한예였음을확인할수있다. 그렇다면 박경휘는 도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헌강왕의 맏 사위가 되었다면 분명 남다른 비범함을 갖췄을 것이다.왜냐하 면 경휘는 엄밀히 헌강왕의 사위이긴 하나 전왕의 직계 혈손이 아니다. 왕의 사위가 대개 화랑이거나 전왕의 혈손인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도 경휘는 예외적 인물에 속한다. 용춘, 응렴, 효 종등이모두화랑이자전왕의혈손이었다. 한데 경휘는 멀리 아달라왕으로 계보가 연결되며, 왕위에선 오랫동안 배제된 박씨 왕족의 후손이다.화랑이라는 기록도 없 으며, 김씨 왕의 혈손도 아니며, 뚜렷한 활약조차 보이지 않는 다. 그런 그가 전왕 헌강왕의 맏사위가 되었다. 이것은 의아함 을 자아낸다. 지금까진 이 모든 의문을 덮어둔 채 다만 예겸의 정치적후광만으로설명해왔다. 하지만 외려 탈해의 경우처럼 왕의 사위가 될 특출한 총지를 발휘했고 그에 힘입어 왕실의 일원이 되었다고 봐야 한다. 따 라서 경휘의 기록이 보이지 않는 것은 작위적인 기록의 민멸이 아닐 수 없다. 실제 왕위에 등극하지 못했음에도 여러 기록이 남아 있는 효종에 비해 신덕왕으로 즉위한 경휘의 활약을 전하 는기록이일절없다. 남은 기록만을 따지다 보니, 경휘의 즉위는 개인의 능력을 뺀 채로, 예겸의 정치적 후광이라는 삿된 결론으로만 이어져 버렸고, 심지어는 6살짜리 여아와 결혼했다는 추론까지 나온 셈이다. 912년 박경휘는 왕으로 즉위했다.김씨 왕실은 578년간의 집 권을 청산하고 왕위를 박씨 세력에게 물렸다. 아달라왕 이래 7 29년 만에 거둔 박씨의 재집권이었다. 한편 박씨의 복위는 신 라가 처한 복잡다단하고 미묘한 정치 상황을 은유적으로 함축 하고있다. 븮산신이 춤도 추고 노래 부르기를 지리다도파도파(智理多都波都波)라 했다. 이것은 대개지혜로 나라를다스리는 많은 사람들이 미리 사태를 짐 작하고도망하여도읍이 장차파괴된다는뜻이다.븯 즉, 지신과 산신은장차 나라가 멸망할것을 알았기 때문에춤을추어 이를경계한 것이다. (븮삼국 유사븯권2기이2처용랑망해사) 나무망국 찰니나제 판니판니소판니 우우삼아간 부이사파가(南無亡國 刹尼那帝 判尼判尼蘇判尼于于三阿干鳧伊娑婆訶)해설하는사람은이렇 게 말했다. 뷺찰니나제(刹尼那帝)란 여왕(女王)을 가리킨 것이요, 판니판니 소판니(判尼判尼蘇判尼)는 두 소판(蘇判)을 말한 것이다. 소판은 관작(官 爵)의이름이요,우우삼아간(于于三阿干)은3,4명의총신(寵臣)을말한 것 이요,부이(鳧伊)는부호(鳧好)를말한것이다.뷻(븮三國遺事븯권2기이진성 여왕거타지) 우공이 슬피 우니 3년이나 가물었고 추연이 슬픔을 머금으니 5월에 서 리가 내렸다. 지금 나의 깊은 시름은 옛 일과 같건만 하늘은 말도 없이 다 만 푸르기만 하는구나. 于公慟哭三年旱, 鄒衍含悲五月霜. 今我幽愁還似 古,皇天無語但蒼蒼.(븮삼국사기븯권10신라본기10진성여왕2년조) 망국의 기세는 헌강왕 이래 커져만 갔다. 효공왕 말년엔 신 라의 힘이 겨우 서라벌 왕도에만 미쳤다. 지방에 대한 지배권 은모두반란세력의수중에떨어졌다. 이런 맥락에서 박씨 세력의 재집권은 역동성을 상실한 천년 왕조의 스산한 퇴행과 점증되는 사직의 위기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는, 거센 격랑을 헤치려는 절실한 노력의 일환이었 다. 또 박혁거세가 개국한 신라의 정신적 문화유산을 면면히 이어받아 제2의 창업을 이루려는 거국적 염원의 결실이고 인 적쇄신의결과였다. 경애왕(신라55대왕.재위924~927) 뱚역사비정(25) 뱛Ⅰ.효종(김부의아비)설화의진실 박 순 교 뱛Ⅲ.효종과효공왕의황음 뱛 Ⅳ.효종이무리수를둔까닭 뱚▶다음호에계속 뱛Ⅱ.효종이거느린화랑도와여왕에의색공 뱛Ⅴ.신덕왕의풍모와왕위계승 뱛 Ⅵ.신덕왕의즉위와효종일가의불만 목 차 Ⅰ.효종(김부의아비)설화의진실 Ⅱ.효종이거느린화랑도와여왕에의색공 Ⅲ.효종과효공왕의황음 Ⅳ.효종이무리수를둔까닭 Ⅴ.신덕왕의풍모와왕위계승 Ⅵ.신덕왕의즉위와효종일가의불만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