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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1월31일 목요일 4 (제145호) 관향조 종친회·집성촌 전라북도 완산군지역(현 전주)은 신라경명왕의 아들 완산 대군(휘언화)께서이지역을식읍으로하여세거를이루면서 대대로 이어져온 전주박씨 터전으로 대군의 16세 효자 죽정 공(휘晋)의효자 정려(旌閭)와 묘소가 전주교동과완산구에 있다. 1500년경 죽정공의 장자 유성(有誠)의 후손들은 전북 남원, 차자 효성(孝誠)의 후손들은 장수에 은둔하기에이른다.연산 군의폭정으로당시의많은선비들이출사(出仕)의뜻을접고 세속(世俗)을 등지며 심산유곡(深山幽谷)을 찾아 은둔하면 서 후학양성에 매진한 것 또한 장수군 계남면으로 세거지를 정한것과무관치않을듯하다. 완주에서 장수군 계남면의 최초 입향지는 궁양리로 추정하 나 장안리의 입향은 상고할 수 없다. 궁양리는 계남면 소재지 에서 장안리로 진입하는 초입에 있으며 이곳에 완산대군의 2 7세 송암공(松菴,휘 재경)께서 지역의 자녀들을 교육하기 위 해세운근수루가있어이를뒷받침해준다. 계남면의 입향조는 완산대군의 21세(世) 양성재(養性齋) 공(公)이다.공(公)의 휘는 삼윤(三胤)으로 인간의 타고난 바 탕과 성질즉 천성(天性)길러내는 데주력하고자 자호(自號) 한 것으로 연산조의 혼탁한 정국을 피해 은거하여 출사하지 않고중종조에생원으로생원공파라하여세계를이룬다. 완산대군의 후예는 지금의 전주를 식읍으로 하여 전주박씨 라한다.대군의7세휘혁(奕)은고려조에대광보국평장사경 연참찬집현전대제학으로 아들 5형제를 두었으나 첫째, 둘째, 넷째는 기록이 전해지지 않고,이중 셋째 휘 지견(地堅,侍中) 은 전주박씨의 대를 잇고, 다섯째 은견(銀堅)은 그의 아들 진 승(進昇)이 고려조 국학전주(國學典酒)로 기자팔조지교(箕 子八條之敎)로써 민심을 순화 한 공으로 무안군에 봉 하고 무 안을식읍(食邑)으로받아무안박씨로분적하였다. 고려시중공(휘 지견)의 아들 현(玹)은 추밀원부사를 역임 하는 등 대대로 고려조에 출사하였으며, 고려 말 진사 경덕재 (經德齋)公 휘 종수(從壽,대군 15世)의 초명은 송년(松年)이 고 자는 수부(壽夫)이다. 고려 1316년(충숙왕 3년)문과에 급 제하였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은 채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고 려가 망하자 완산에 은거하여 태조 이성계의 부름을 받았으 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그는 죽음에 이르러 ‘충효(忠孝)’에 관한 시를 지어 자손에게 전하였으며, 임실 덕암서원에 배향 되고고려32현으로불려진다. 그의 장자 진(晋)의 호는 죽정(竹亭)으로 타고난 효자이 다. 당시 군수(郡守)의 관직(官職)을 수행(遂行)하다 부친 (父親)의 병환(病患)이 위독(危篤)하다는 소식을 듣고 부친 을 모시기 위해 1395년 관직(官職)을 사직(辭職)하고 황급히 서둘러 가마를 재촉하여 부모님이 계시는 전주부(全州府)에 이르니 장마로 남천이 범람하여 다리가 부수어져 떠내려가고 길 은 끊 겨 이 미 몇 일 동 안 아 무 도 통 행 (通 行 )을 못 하 는 실 정 이었으나 위독한 부친을 생각하면 한시라도 지체할 수없는 심정인지라 위험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말을 채찍질하여 곧 바로 강으로 뛰어들었다.그는 하늘이 감동(感動)했음인지이 상하게도 강물이 갈라져 어렵지 않게 강을 건너고 나니 강물 은 다시 합해져 흐르는 것으로 주위사람들은 놀라며 탄복해 마지않았다. 어렵게도착아버지병구완에정성을다하였고효행으로지 극히 모셨으나 동지(冬至) 섣달 엄동설한에 아버지께서 병환 으로 누워 계시면서 아버지가 아무런 음식을 못 드시기에 음 식 드시기를 간청하니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무것도 먹 고 싶 지 않 고 삶 은 꽃 을 먹 고 싶 구 나 하 셨 다 . 때 가 아 닌 데 어 떻 게 한 단 말 이 냐 하 고 한 탄 을 하 였 으 나 이 내 선 생 은 목 욕 을 재 개하고 하늘에 축원을 하였다. 그리고 양지바른 산을 찾아 나 서니 이상하게도 몇몇 진달래 나뭇가지에 홀연히 꽃이 피어 있어 그 꽃을 꺾어다 삶아서 아버지에게 올렸으며 수박과 잉 어를 구해 음식을 올렸다.이일로 인하여 그 꽃을 얻은 산(山) 을 박모산(朴某山)이라고이름붙여 불러졌다.이렇게 정성을 다하여 부친을 공경하였고 또 다른 효행으로 때가 이른 시기 에 수박이 먹고 싶다는 아버지의 말씀에 어려운 수박을 구해 아버지에게 올렸다는 내용이 알려 저 그곳을 수박동이라 이 름 붙혀 부르기도 하였고 잉어를 구한 곳을 잉어소라 이름이 붙여져 전해지고있다.병환(病患)을 구완하여 부모에게효행 을 한사실과 부친께서세상(世上)을뜨시어 그는 통곡(痛哭) 하면서 시묘(侍墓) 생활(生活)을 3년간 실시하는 등 효행이 지극하여많은사람들에게귀감이되어당시금세(今世)증삼 (曾參)이라 불리었으며 전주부사 성석용이 선생의 효행을 가 상히 여겨 임금님에게 글을 올려 그 후 이조(李朝)초기 태조 (太祖)7년 (1398. 무인(戊寅))에 효자비(孝子碑)를 정려(旌 閭)받아 전주시 남문거리에 최초 건립이 되었으나 도시발전 으 로 전 주 시 교 동 전 조 향 교 앞 으 로 이 축 하 여 유 지 되 고 있 으 며, 현재 전주시 향토문화유산 제5호(2009년 지정)로 지정되 어만인에귀감이되고있다. 죽정공의 장자 유성(有誠)과 차자 효성(孝誠) 또한 효자로 3대에 걸쳐 효(孝)를 실천하여,삼강행실록 및 호남 삼강록에 전해진다. 차자 효성(孝誠)은 장수 입향조의 고조부로 1408년 진사시 에 오르고 1422년 문과에 급제하여 감사를 지냈고, 증조부의 휘는 승백(承伯)으로 생원이고, 조부의 휘는 문증(文增)으로 군수, 아버지 휘 계인(諱 桂仁)으로 통례원 봉례(奉禮, 정4 품),어머니는창녕성씨이다. 전주박씨 장수의 입향은 1500년 경이다. 입향 이후 선조의 삶과 사상은 애민과 지역의 학풍에 있다.입향조 양성재공(휘 삼윤)은 중종조의 생원으로 그의 아들 석령(碩齡)의 호는 계 동(溪東)으로명종조에생원으로효행이뛰어났다. 손자 언상(彦祥)은 통정대부,증손 호( 紫)는 선무랑으로 사 옹시주부이고 5대손 희채(喜采)의 호는 명와(明窩), 행실이 돈독하고 학행이 뛰어났으며 화양리에 지역의 유지들과 함께 후학들의 교육의 장이 된 흥학당 건립에 아들 필승(必昇), 필 성(必晟), 필화(必華), 필순(必淳)과 손자 세한(世漢), 양한 (良漢), 삼종형제 양채(亮采), 응채(應采)와 그들의 손자 종 한(宗漢), 조한(祚漢), 양한(良漢) 등 13명이 동참하는 등 남 다른 향학(向學)을 보여주어 당시 장수지 역의 명현들과 함께 하며남긴많은기록과유물이산재해있다. 숙종 43년(1717년 건립된 흥학당(興學堂)은 계남면 화양리 에 있으며 연안송씨(延安宋氏)·남원양씨(南原梁氏)·보성오 씨(寶城吳氏)·문화유씨(文化柳氏)·충주박씨(忠州朴氏)·전 주최씨(全州崔氏)·전주박씨(全州朴氏)·동래정씨(東萊鄭 氏)·금계한씨(錦溪韓氏)·안음서문씨(安陰西門氏)·청주한씨 (淸州韓氏) 등 11성씨의 결사(結社)로 세워진 강학의 장소이 다. 계남면 궁양리의 근수루(近水樓)는 사인(士人) 오서규, 양 하조, 박재경(朴再絅, 27世)등이 동지(同志)들과 함께 강학 (講學)습례(習禮)한 곳으로 명와공(휘 희채)이 쓴 중수기가 걸려있다. 궁양리의 백인대(百忍臺)는 농은 박계대(農隱 朴啓大, 33 世) 통정대부 도정을 지내시고 낙향선생이 서식했던 곳으로 세이파정청심석백(洗耳波淨淸心石白)의 8字가 새겨져 있다. 농은공은 청빈한 선비로 생활하면서 맑은 물에 마음과 얼굴 을 씻으면서 백석과 같이 청정을 읊으시며 새겨놓은 글자의 뜻이후세의교훈으로이어져오고있다. 농은공의아들기복(基福)은학문과 도학이 뛰어났으며,원 릉참봉(영조와 정순왕후의 능) 참봉이고 아들 동현(東鉉)은 지방행정 서기 및 의원으로 타고난 숭조심과 종친간이 돈목 을이끌었으며,지역유림들의칭송을받았다. 1658년지역자녀들의교육을위해공동으로설립한교육시 설이다. 계남면 화음리 입구 도로변에 있는 벽남정(碧南亭)은 지역 의 선비 (박기복. 오일승 등)20인이 매년 춘추에 모여 교류하 던장소로주로지기상부(志氣相符)하여애경상문(哀慶相問, 애경사에 서로 찾아보는 것은 우리 사회의 아름답고 좋은 풍 속) 하던 곳이다. 이밖에도 방수대, 장안정, 선유정 등 강학을 목적으로 세운 건물이 있어 후진양성에 심혈을 기울인 것을 엿 볼 수 있 다 . 또, 대대로 이어오며 많은 명현석학을 배출하였으며 효자 열녀(열부), 덕행(德行)과 유행(儒行), 선행(善行)으로 이름 을떨친후손이수두룩하다. 추원재(追遠齋)는 장안리 마을 뒤편 선산아래에 있다.입향 500여년이 넘도록 조상(祖上)을 숭모하는 재실(齋室)이 없음 을 안타까워하고 있던 중 대군의 35세손 규현(珪鉉), 동현(東 鉉), 수현(水鉉), 태현(太鉉)과 후손인 순권(淳權) 등이 뜻을 모아 1977년 3월 착공하여 후손들의 노력으로 그해 9월말에 준공하였으며, 입향조인 양성재공 이하 선조의 재숙소로 사 용하고있다. 추원재 옆 완산대군의 신도비가 있다. 신도비는 대군의 후 손으로 순창, 무안으로 분적하고 전주박씨에서는 진사공파, 목사공파 생원공파로 분파 전국의 많은 성손이 거주하고 있 으나 규합이 어려워 지금까지 신도비를 건립과 향화를 받들 지 못하였으나 생원공파 종회에서 건립비용 전액과 부지를 마련하고 건립에 이르러 2008년 4월 준공 매년 생원공파 중심 으로향화를받들고있다. 뱚집성촌탐방 전북장수군계남면장안리전주박 씨생원공파 전라북도동부에있는장수군은높은산지가많아 산세가험하다.계남면은 대부분의지역은소백산 맥에속하는산지이며,장계천주변에좁은평야가 발달해있다.특히소백산맥의산간을이용한사과 와 오미자 등 고랭지채소 재배가 활발하다. 특히 이지역은충주박씨와전주박씨의500여년세거지 이기도하다.계남면장안리는백두대간의기운을 충청도와 전라도에 전하는 호남의종산장안산 아 래에 있다.전형적인 시골마을로전주박씨후손들 의집성촌으로 대대로 후학들의면학 분위기를 조 성하고인재를기르는데중점을두었음을알수있 는 문화유적이 인근에 산재해 있으며, 완산대군 후 죽정공(諱 晉)을 비롯 아드님 효우당(휘 有誠) 등효의실천으로 이를 본받고 이어가면서 효의세 가(孝儀世家)로도불러지고있어찾아가본다. 계남면화음리벽남정에서부터원장안리전경,주변에강학을위한 유적이 산재해있다. 집성촌원장안리,추원재와완산대군신도비가있다. 추원재. 완산대군신도비 뱚장수군계남면입향 뱚입향조선원세계 뱚전주박씨입향과지역에끼친학풍 흥학당:계남면화양리 벽남정-계남면화음리도로변,지역의선비(박기복 .오일승등)20인이 매 년춘추에모여교류하던장소 근수루:장수군향토문화유산유형제1호(장수군계남면궁양리) 뱚추원재(追遠齋)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