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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1월31일 목요일 12 (제145호) 기획 조선시대 여성 교육의 표상이 있었으니 바로 퇴계선생의 어머니 춘천박씨이다.퇴계의 어머니가 세상에 크게 알려지지 않은 것은 알고 있던 지식과 생 각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속으로만 생각하면서 자녀들로 하여금 실천궁행케 했던데 있었다.퇴계 어머니 박씨 부인이 퇴계 형제들을 교육한 방법은 외양보다내실을닦게했고,또그것을보통의어머니로서실천했다.매양훈계를할때는문예를일삼을뿐만 아니라자기몸을지키고행동을삼가는일 을소중하게여겼다.어떤어려운경우를만나면비유를들어말씀하기도하고그일에맞추어가르치기도했 는데,일찍이간곡하고절실하게경계하지 않은적이없었다.그리하여말씀하기를“세상에서항상과부의자식은가르침을받지못했다고욕한다.너희 들은그공력을백배로들이지않는다면어 찌이런비난을면할수가있겠느냐?”라고하였으니두아들온계(휘해)·퇴계(휘황)선생이과거에급제하고 큰선비가될수있었던것이다. 퇴계의 어머니, 춘천박씨 부인은 고난의 일생 을 사셨지만 또한 영광의 일생을 사셨다.고난의 일생을 사셨다고 하는 것은 6남 1녀를 편모 혼자 힘으로 장성시켜 성혼에 이르게 하기까지 고생이 막심했던 일을 가리키는 것이며, 영광의 일생을 사셨다고 하는 것은 퇴계와 같은 대현을 길러 내 었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퇴계연보는 모부 인 박씨의 훈도가 퇴계의 생애를 절대적으로 결 정하였다는사실을확인해주고있다. 퇴계가8세였을때퇴계의둘째형이칼에손을다 쳤다.퇴계가 형을 붙들고 우는 것을 보고 어떤 부인 이말했다.『너희형은손을다쳤는데도울지않는데 네가 왜 우느냐?』 퇴계가 대답하기를 『형이 비록 울 지아니하나피가저렇게흐르는데어찌아프지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퇴계는 온순하고 공손하고 겸손 하여 어른에게 태만한 얼굴을 한 적이 없었다. 비록 밤중에깊이잠이들었다가도어른이부르면곧깨어 나서 대답하기를 매양 겸손하게 하였다. 6,7세 때부 터그렇게하였다고했다.그품성은어머니로부터받 은것은물론어머니의훈도가퇴계를그렇게만들었 던것이다.32세에홀로된퇴계의어머니는남편의3 년 상을 마치자 제사일은 맏아들에게 맡기고, 그 옆 에 방을 지어 거처하면서 더욱 열심히 농사를 짓고 누에를쳤다.갑자년(연산군10년,1504)과을축년(연 산 11년)에는 부역과 세금이 혹심하여 많은 사람들 은 살림이 결단 났는데도 박씨 부인은 능히 먼 앞날 을 내다보고 환란을 도모할 수 있었으며 옛 가업을 잃지 않고 지킬 수 있었다.박씨 부인은 손발을 걷어 붙이고집안일을경영하는데나서지않을수없는처 지였으나, 한편으론 자식들이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도록독려하고,또공부하도록글방에보냈다. 여러 아이들이 점점 자라면서 가난을 벗어날 수 있었으며 멀고 가까운 스승을 쫓아 공부하도 록 학자금을 마련하였다. 언제나 훈계하시기를 다만 문예만 할 것이 아니라 몸가짐을 삼가는 것 이 귀하다 하였고 사물에 알맞은 비유로써 가르 침을 하였다.언제나 간절히 경계하시기를 세상에 서는 과부의 아들은 배움이 없다고 말하니 너희 들이 백배의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비웃 음을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 라고 말했다.뒤에 두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오르니, 어머 니께서 영진(榮進)이라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늘 상 세상의 환란을 근심하였다.』고 퇴계는 기록하 고 있다.퇴계의 어머니는 글 공부나 과거급제를 단순히출세로보지않고인간됨의길로보았다. 실제로 퇴계는 사마시(진사시험)에 합격한 뒤 에 과거 보는 데 뜻이 없었다. 형 대헌공(大憲公) 이 어머니에게 여쭈어 허락을 받고 퇴계가 과거 에 나 간 것 은 3 2 세 때 였 다 .이 해 에 문 과 별 시 의 초 시에 2위로 퇴계는 합격했다.퇴계 형제의 학문은 어머니의 독려와 뒷받침으로 이루어진 것을 다시 금 확인할 수 있다. 34세 되던 3월, 과거에 급제하 고 출세하여 예문관 검열로 임명되었고 7월에는 휴가를 얻어서 시골집으로 내려와 근친한다.퇴계 는 어머니의 모습을 마음속에 깊이 새긴다. 비록 문자를 배운 적은 없으나 평소에 늘 들은 아버님 의 정훈(庭訓)과 여러 아들이 서로 강습하는 것을 들어서 가끔 깨우쳐 이해하는 바가 있었으며, 의 리로 비유하여 사정을 밝게 하는 지식과 생각은 마치 사군자(士君子)와 다를 바 없었다.그러나 속 으로만 지니고 있을 뿐 겉으로는 항상 조용하고 조심할 뿐이었다.정유년(서기 1537년)10월 15일 에 병환으로 돌아가시니 향년 68세였으니 퇴계 선 생이지은어머니의묘갈지를덧붙인다. 어머님정부인박씨는그선 조가 강원도 춘천부 사람이 다. 고려 말에 휘 원비(元庇) 인 분 이 있 었 는 데 벼 슬 이 판 사(判事)에 이르렀다. 판사의 아들이 광정(光廷)인데 경상 도 용궁현 대죽리로 옮겨 살 았다. 이분이 부인에게 고조 가 된다. 증조는 휘 농(農)인 데 칠 원 (漆 原 , 현 경 남 함 안 지 역) 현감을 지냈고 조부는 휘 효전(孝佃)이고 부친은 휘 치(緇)인데 모두 덕을 간직하고서 숨어 살면서 벼슬하지 않았다. 모친 은 월성이씨로 생원 휘 시민(時敏)의 따님이고, 대사헌휘승직(繩直)의후손이다. 부인은 성화(成化) 경인년(1470) 3월 18일에 태어났다. 타고난 자질이 아름답고 얌전하였다. 우리 아버지에게 시집와 후취부인이 되었다. 아 버지는 뜻을 독실히 하여 옛것을 좋아했고 경사 (經史)를 즐겼다. 아울러 과거공부도 일삼아 집 안일에는 마음을 쓰지 않았다. 부인은 시어머니 모시기를 조심스럽게 하고 정성스럽게 제사를 받 들었으며, 부지런하고 검소한 것으로 집안을 다 스렸다. 아랫사람들을 대하는 데는 엄하면서도 은혜로움이 있었으므로 아랫사람들은 모두 그 덕 을 입었다고 생각하였다. 길쌈하고 바느질하고 음식 장만하여 먹이기를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 지감히조금도게을리함이없었다. 신유년(1501)에 아버지가 진사에 합격하였고, 그 다음해 여름에 병으로 돌아가셨다. 그때 맏형 만 겨우 장가를 들었고, 그 나머지 어린자식들이 앞에 가득하였다. 부인은 아들을 많이 두었으면 서도 일찍 홀로 되어 장차 문호를 유지하지 못할 까 슬피 염려하여, 여러 자식들을 혼인시키고 성 취시키는일을크게금심하고슬퍼하였다. 삼년상을 마치자 제사 지내는 일은 맏아들에게 맡기고 그 곁에다 집을 짓고 살면서 농사와 누에 치는 일에 더욱 힘썼다. 연산군의 폭정을 당하여 세금 거두는 일이 더욱 가혹하고 성화같아 피신 하여 몰락하는 사람이 많았는데도 부인은 어려운 일을 견뎌내고 먼 앞일을 생각하여 옛 가입을 잃 지 않았다. 여러 아들들이 점점 장성하자 가난한 살림살이를 쪼개어 학비를 마련하여 먼 곳이나 가까운곳에나아가공부하게해주었다. 매양훈계를할때는 문예를 일삼을뿐만아니라 자기몸을지키고행동을삼가는일을소중하게여 겼다. 어떤 어려운 경우를 만나면 비유를 들어 말 씀하기도하고그일에맞추어가르치기도했는데, 일찍이 간곡하고 절실하게 경계하지 않은 적이 없 었다. 그리하여 말씀하기를 “세상에서 항상 과부 의자식은 가르침을받지못했다고욕한다.너희들 은 그 공력을 백배로 들이지 않는다면 어찌 이런 비난을면할수가있겠느냐?”라고하였다. 나중에 두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간 것을 보고서, 부인은 영화롭게 나아가는 것 을 기쁨으로 여기지 않고 늘 세상의 환란을 걱정 으로 삼았다. 비록 글자를 배운 적은 없었지만 평 소에 돌아가신 아버님이 자식들을 가르치는 훈계 를 익혀 들었고, 여러 아들들이 학문을 익힘에 미 쳐서 때때로 깨달은 바가 있어, 의리를 알고 사정 에 밝아 그 식견이 사군자(士君子)와 같았다. 그 러나 그 문채를 안으로 머금고서 밖으로 드러내 는일이없이늘겸손했을따름이었다. 가정(嘉靖) 16년 정유(1537) 10월 15일에 부인 께서 병으로 돌아가시니 향년 예순여덟이었다. 그해 12월 19일 갑자에 사시던 예안현 북쪽 온계 리(현 도산면 온혜리) 수곡 남향의 언덕에 장사 지냈는데돌아가신아버님과같은묘역이었다. 돌아가신 아버지께서는 일곱 아들과 두 딸을 두 었는데,잠(潛)은 충순위를 지냈고,하(河)는 예천 현감을 지냈다.딸은 신담(辛聃)에게 시집갔다.이 들은 돌아가신 어머니 김씨의 소생이다. 부인께서 는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서린(瑞麟)은 관례도 올 리지 않고서 일찍 죽었다.의( 촁)는 유학을 업으로 삼았으나 일찍 죽었다. 해(瀣)는 무자년(1528) 과 거에 급제하여 가선대부 사헌부 대사헌을 지냈다. 돌 아 가 신 아 버 지 와 부 인 께 서 추 증 받 은 것 은 해 의 추은(推恩) 말미암은 것이다. 징(澄)은 찰방을 지 냈다. 황(滉)은 갑오년(1534)에 등과하여 지금 통 정대부대사상으로있다.(이하생략). 가정35년(1 556)병진3월 일아들황은삼가적는다.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경명(景明), 호는 온 계(溫溪). 선산 이정(李禎)의 증손으로, 할아버 지는 진사 이계양(李繼陽)이고,아버지는 식진사 이식(李埴)이며, 어머니는 사정(司正) 박치(朴 緇)의딸이다.이황(李滉)의형이다. 어려서 작은 아버지 이우(李 쨀)에게 글을 배워 1525년(중종 20)에 진사가 되었고, 1528년 식년문 과에병과로급제하였다.1533년에사간·정언등을 거쳐 1541년 직제학에 올랐으며, 이어 경상도진휼 경차관(慶尙道賑恤敬差官)·좌승지·도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544년에 첨지중추부사·대사헌·대사 간·예조참판을 지내고, 이해 또다시 대사헌이 되 었다.인종이 즉위한뒤에도 계속 대사헌으로 있으 면서 권신 이기(李潭)를 우의정에 탁용(擢用: 발 탁하여 등용함)하려는 것을 반대하고 탄핵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이기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1545년 (명종 즉위년) 강원도관찰사에 이어 1547년에 황 해도관찰사, 1549년에 청홍도관찰사를 거쳐 1550 년에는 한성부우윤이 되었다. 그러나 명종이 즉위 하면서 소윤이 득세하였기 때문에 이기의 심복인 사간 이무강(李無彊)의 탄핵을 받아 무고사건에 연좌된구수담(具壽聃)의일파로몰리게되었다. 그 때 주위사람들이 권세에 거짓으로 굴복하면 모면할 수 있다고 권하였으나 거절하였으며, 마 침 김안로(金安老)가 인근에 살았으므로 권세로 이끌려 하였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그러나 명종 이 그의 결백함을 알고 특별히 갑산에 귀양 보내 는 것으로 그쳤지만, 귀양가는 도중에 양주에서 병사하였다. 예서(隷書)에 뛰어났으며 선조 때 벼슬이환급되었다.이조판서에추증되었다. 영남 유생 300여명이 온계(溫溪) 선생에게 시 호(諡號)를 내려줄 것을 청했고, 그에 따라 시장 (諡狀)이 작성되었으니 ‘공은 덕성이 너그럽고 도 량 이 넓 었 다 ..... 남 가 더 불 어 말 을 할 때 는 온 화 하고 정성스러워 사납거나 거만한 기색이 없었 다. 그러나 조선에서 옳고(是), 그름(非), 나아감 (進)과 물러남(退) 등을 논의할 때는 남달리 두 드러지고 꼿꼿한 면이 있었다. 일찍이 화복(禍 福)과 이해(利害)를 비교해서 남보다 앞서 나가 거나 뒤로 물러나 숨는 일이 없었다. 군자들은 이 러한 점 때문에 그를 흠모하고 사랑했으나, 소인 들은이러한점때문에그를원수처럼미워했다.’ 1874년 시호를 내리니 ‘정민(貞愍)이다. 의미는 ’절조를 지키고 청렴하니 정이요(守節淸白曰貞), 백성들로 하여금 슬프게 하였으니 민이다.(使民 悲傷曰愍)‘라는 의미다. 백성을 슬프게 했다는 것 은억울한죽음을당한사실을의미하는듯하다. 온계선생은이런사람이었다.부당한일을외면하 지 않고 선비가 가야 할 길을 올곧게 갔다. 그래서 잘 못된 권력에 의해 혹독한 고문을 당한 뒤 유배를 가 는 도중에 최후를 맞게 되어 그의 아우인 퇴계 선생 과 비교되기도 한다. 선생은 영주의 삼봉서원(三峰 書院),예안의청계서원(淸溪書院)에배향되었다. 효종(孝宗 명나라 황제) 홍치(弘治) 14년 연산 군 7 년 (신 유 ) 1 1 월 2 5 일 기 해 진 시 (辰 時 ) 에 , 선 생은 예안현(禮安縣) 온계리(溫溪里)에서 나셨 다.선생의 선조는 진보현(眞寶縣)에 살았는데,5 대조 송안군(松安君)이 왜적을 피하여 안동부 풍 산현( 銀山縣) 남쪽 마애리(磨崖里)로 이사하여 살았다. 뒤에 또 주촌(周村)으로 옮겼고, 조부 판 서공 때에 이르러 예안현 북쪽 온계리의 빼어난 산수를사랑하여비로소거기에살게되었다. 홍치(弘治)15년 (임술) 2세 6월에 찬성공이 별 세하다.선생이 지은,선비(先삽 돌아가신 어머니) 정경부인(貞敬夫人) 박씨(朴氏)의 묘갈(墓碣)을 보면 “선군(先君)이 병으로 돌아가셨을 때 큰형이 겨우 장가들었고, 그 나머지 어린 것들이 앞에 가 득하였다. 부인은, 사내 자식은 많은데 일찍 홀몸 이 되 어 장 차 집 안 을 유 지 하 지 못 할 까 매 우 염 려 해 서, 더욱더 농사와 양잠 일에 힘써서 옛 살림을 잃 지 않으셨다. 여러 아들이 점점 장성하자, 가난한 중에도 학비를 내어 먼 데나 가까운 데나 취학을 시 켜 서 늘 훈 계 하 였 으 니 , 문 장 에 만 힘 쓸 뿐 아 니 라 특히몸가짐과행실을삼가는것을중하게여겨서, 항상간절히타이르기를,‘세상에서는보통과부의 자식은 옳게 가르치지못하였다고 욕을 한다.너희 들이 남 보다 백배 더 공부에 힘쓰지 않는다면, 어 떻게 이런 비난을 면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 다.”하니,이것을 보면 선생은 비록 일찍이 아버지 를 여의었으나, 그 학문을 성취할 수 있었던 데는 어머니의영향이많았다는것을알수있다. 무종(武宗) 정덕(正德) 원년 중종대왕 원년 (병인)6세 처음으로 글 읽을 줄 알게 되다.8세에 둘째 형이 칼에 손을 다쳐 선생이 붙들고 울자,어 머니 춘천박씨께서 “너의 형은 손을 다쳤는데도 울지 않는데,네가왜 우느냐?”하니,대답하기를, “형은 울지 않으나,피가 저렇게 흐르는데 어떻게 손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선생은 온순 하고 공손하며 겸손하고 우애가 있었다. 존 장자 를 대할 때에는 감히 태만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 었고 밤중에 깊이 잠들었다가도 어른이 부르면 곧 깨어나서 바로 대답하고 매우 조심하였다.6,7 세때부터벌써그러하였다. 숙부 송재공(松齋公) 이우(李 쨀)에게 12세에 논어를 배우는데 “제자가 들어가면 효도하고, 나 가면 공순하여야 한다.”는 대목에 이르자,근심하 여 스스로 경계하기를, “사람 된 도리가 당연히 이와 같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하루는 이(理) 라는 글자로 송재공에게 묻기를,“모든 일에 있어 옳은 그것이 이(理)입니까?” 하니, 송재공이 기 뻐하면서, “네가 벌써 글의 뜻을 알았구나.” 하였 다. 송재공은 성격이 근엄하여 자제(子弟)들에게 인정해 주는 일이 적었으나,선생이 형 대헌공(大 憲 公 ) 이 해 ( 李 瀣 )와 함 께 글 을 배 울 때 에 , 송 재 공 이 늘 칭찬하면서, “죽은 형이 이 두 아들을 두었 으니, 죽은 것이 아니다.”라고 하고, 또 선생을 가 리켜 말하기를,“우리 가문을 유지할 자는 반드시 이아이일것이다.”라고하였다. 1523년 선생이 처음으로 태학에 유학(遊學)하 였는데, 기묘(己卯)의 화를 거친 뒤였으므로 선 비들의 풍습이 부박(浮薄)하여서, 선생의 법도 있는 행동거지를 보고 많은 사람들은 비웃을 뿐 이요, 서로 상종하는 이는 오직 하서(河西) 김인 후(金麟厚) 한 사람 뿐이었다. 얼마 안 되어 선생 이 고향으로 돌아갈 때, 하서가 작별시를 지어 주 었는데, “그대는 영남의 수재요, 이(李)ㆍ두(杜) 의문장에왕ㆍ조의글씨라.”라는구절이있었다. 1532년 사마시(司馬試 진사시)에 합격한 뒤로 는 과거 보는 데 뜻이 없었으나, 형 대헌공(大憲 公)이 어머니에게 여쭈어 권하므로 과거에 나가 게 되었다.이해에 문과 별시의 초시(初試)에 2위 로입격하였다. 1534년 34세에 과거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가 승문원 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에 보임 되었다가,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겸 춘추관기 사관(春秋館記事官)으로 천거되었으나 곧 체차 되어 도로 승문원 부정자가 되다. 선생의 장인인 권질은 정언(正言) 권전(權 )의 형이었다. 권 전은 기묘 사류(己卯士類)로서 안처겸(安處謙) 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죄를 입고 죽었다. 권 질도 연좌되어 내쳐지게 되었다. 이때에 간관이 권력층의 사주를 받아 “아무개(선생을 가리킴) 는 권질의 사위이니,사관(史官)이 될 수 없고,그 를 천거한 자도 역시 옳지 못합니다.”라고 아뢰 어, 예문관관(藝文館官)을 추고(推考)하고 선생 을 사관직에서 체차시킬 것을 청하였다. 그 때문 에 의논이 분분하여, 예문관 관원이 모두 파면되 고,선생도드디어갈리게되었다. 영천군(榮川郡)에 김안로의 논밭이 있었는데, 그곳은 전 부인 허씨의 친정이 있는 곳이었다. 김 안로가 동향이라는 이유로 선생을 만나자고 하였 으나, 선생이 가서 만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때부 터 앙심을 품고 대간을 사주하여 탄핵하게 하였 던 것이다. 6월, 정자(正字)로 승진되다. 7월, 휴 가를 얻어 고향에 내려가 근친(近親)하다. 10월, 저작(著作)으로 승진되어 서울로 돌아오다. 정시 (廷試)의시제(試題)가〈문신기영회도(文臣耆英 會圖)〉였고 10운의 배율시로 짓는 것이었는데, 선생이 장원을 차지했다. 12월, 무공랑(務功郞) 박사(博士)로승진되다. 1537년(丁酉) 37세 4월에 선교랑이 되고, 5월, 승훈랑(承訓郞), 9월 승의랑(承議郞)이 되었다. 10월, 어머니 박씨의 상사(喪事)를 당했다. 선생 이 6품에 오르면서부터 지방관으로 나가 어머니 를 봉양하는데 편하게 하려 했으나, 요직에 있는 자에게 저지되었다. 이때 어머니의 별세 소식을 듣고 서울로부터 급히 달려갔다. 초상을 치르는 동안에 꼬챙이처럼 말라 병을 얻으니, 거의 생명 을 잃을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12월, 갑자일에 박 부인을 온계리(溫溪里) 수곡(樹谷) 언덕에 장사 지냈다. 삼년상을 치르고 이후 홍문관 부수찬, 수찬지 제교 겸 경연검토관, 사간원 정언, 승문원 교검 (承文院校檢), 사헌부 지평, 형조정랑 겸 승문원 교리, 홍문관부교리 겸 경연시독관 춘추관기주 관, 홍문관교리, 1537년 재해를 시찰하는 어사로 임명되어강원도로갔다. 1543년 10월 성균관사성으로 승진하자 성묘를 핑계삼아사가를청해고향으로되돌아갔다. 을사사화 후 병약함을 구실로 모든 관직을 사 퇴하고,1546년(명종 1)고향인 낙동강 상류 토계 (兎溪)의 동암(東巖)에 양진암(養眞庵)을 얽어 서 산운야학(山雲野鶴)을 벗 삼아 독서에 전념하 는 구도 생활에 들어갔다.이때에 토계를 퇴계(退 溪)라개칭하고,자신의아호로삼았다. 그 뒤 에 도 자 주 임 관 의 명 을 받 아 영 영 퇴 거 (退 居)해 버릴 형편이 아님을 알고,부패하고 문란한 중 앙 의 관 계 에 서 떠 나 고 싶 어 서 외 직 을 지 망 하 여, 1548년 충청도 단양군수가 되었다. 그러나 곧 형이 충청감사가 되어 옴을 피해, 봉임 전에 청해 서경상도풍기군수로전임하였다. 풍기군수 재임 중 주자가 백록동서원(白鹿洞 書院)을 부흥한 선례를 좇아서,고려 말기 주자학 의 선구자 안향(安珦)이 공부하던 땅에 전임 군 수 주세붕(周世鵬)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 (扁額)·서적(書籍)·학전(學田)을 하사할 것을 감사를 통해 조정에 청원하여 실현을 보게 되었 다. 이것이 조선조 사액서원(賜額書院)의 시초가 된소수서원(紹修書院)이다. 1년 후 퇴임하고,어지러운 정계를 피해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寒棲庵)을 지어 다시금 구도 생활 에 침잠하다가, 1552년 성균관대사성의 명을 받 아 취임하였다. 1556년 홍문관부제학, 1558년 공 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여러 차례 고사하였다. 1 543년 이후부터 이때까지 관직을 사퇴하였거나 임관에응하지않은일이20여회에이르렀다. 1560년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아호를 ‘도 옹(陶翁)’이라 정했다.이로부터 7년간 서당에 기 거하면서 독서·수양·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들을훈도하였다. 명 종 은 예 (禮 )를 두 터 이 해 자 주 이 황 에 게 출 사(出仕)를 종용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에 명 종은 근신들과 함께 ‘초현부지탄(招賢不至嘆)’이 라는 제목의 시를 짓고, 몰래 화공을 도산에 보내 그 풍경을 그리게 하였다. 그리고 그것에다 송인 (宋寅)으로 하여금 도산기(陶山記) 및 도산잡영 (陶山雜詠)을 써넣게 해 병풍을 만들어서, 그것 을 통 해 조 석 으 로 이 황 을 흠 모 했 다 한 다 . 그 뒤 친 정(親政)하게되자,이황을자헌대부(資憲大夫)· 공조판서·대제학이라는 현직(顯職)에 임명하며 자주 초빙했으나, 이황은 그때마다 고사하고 고 향을떠나지않았다. 그러나 1567년 명나라 신제(新帝)의 사절이 오 게 되자, 조정에서 이황의 내경(來京)을 간절히 바라 어쩔 수 없이 한양으로 갔다.명종이 돌연 죽 고 선조가 즉위해 이황을 부왕의 행장수찬청당상 경(行狀修撰廳堂上卿) 및 예조판서에 임명하였 다.하지만신병때문에부득이귀향하고말았다. 그러나 이황의 성망(聲望)은 조야에 높아, 선 조는 이황을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우찬성 에 임명하며 간절히 초빙하였다. 이황은 사퇴했 지만 여러 차례의 돈독한 소명을 물리치기 어려 워 마침내 68세의 노령에 대제학·지경연(知經 筵)의 중임을 맡고, 선조에게 「무진육조소(戊辰 六條疏)」를 올렸다. 선조는 이 소를 천고의 격언, 당금의 급무로서 한 순간도 잊지 않을 것을 맹약 했다한다. 그 뒤 이황은 선조에게 정이(程 視)의 「사잠(四 箴)」, 『논어집주』·『주역』, 장재(張載)의 「서명 (西銘)」 등의 온오(蘊奧)를 진강하였다. 노환 때 문에 여러 차례 사직을 청원하면서 왕에 대한 마 지막 봉사로서 필생의 심혈을 기울여 『성학십도 (聖學十圖)』를 저술하여 어린 국왕 선조에게 바 쳤다. 1569년(선조 2)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 양하고,번번이 환고향(還故鄕)을 간청해 마침내 허락을 받았다. 환향 후 학구(學究)에 전심하였 으나,다음 해 11월 종가의 시제 때 무리를 해서인 지 우환이 악화되었다. 그 달 8일 아침, 평소에 사 랑 하 던 매 화 분 에 물 을 주 게 하 고 , 침 상 을 정 돈 시 킨 후, 일으켜 달라 해 단정히 앉은 자세로 역책 (易혠:학덕이높은사람의죽음)하였다. 선조는 3일간 정사를 폐하여 애도하고, 대광보 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영사를 추 증하였다. 장사는 영의정의 예에 의하여 집행되 었으나, 산소에는 유계(遺誡)대로 소자연석에 ‘ 퇴 도 만 은 진 성 이 공 지 묘 ( 退 陶 晩 隱 眞 城 李 公 之 墓)’라새긴묘비만세워졌다. /출처 : 퇴계 연보 및 박씨부인 묘갈지(일부는 인터넷에서발취함) 퇴계이황의어머니춘천박씨 선조 유지를찾아븣 성현의어머니,춘천박씨부인 퇴계선생 태실(노송정종택). 퇴계 선생의 조부 이계양 公이 지은 집으로 1454년(단종2년)에 지어진550년이넘는고택으로퇴계선생이1501년11월에이집에서태어났다고하여퇴계태 실이라고한다.지방문화재(60호,1985년) 퇴계종택(안동시도산면토계리46 8-2).퇴계선생의종택으로원래건물은없어졌으나1929 년선생의13대사손하정공(霞汀公)이옛종택의규모를참작하여지금의터레새로지었다. 종택의오른쪽에는추월한수정이라는정자가있다.(경상북도기념물제42호) 퇴계선생의어머니춘천박씨묘.경북안동시도산면온혜리. 선비증정부인박씨묘갈지(墓碣誌) 춘천박씨묘비 온계(溫溪)이해(李瀣) 퇴계(退溪)이황(李滉)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