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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말을 합쳐 대답하기를 “재실이 이미 중건(重建)되어 마땅하 별도 의 기문이 았어야 하거늘, 선생이 지어주선 글이 없어서야"라고 하였다. 때문에 그 집의 짜임새를 대략 말하건대 재실은 무릇 5간으로 가운데에 2간 은 당마루(堂廳)로 하였고, 동·서(東西)로는 방(房)을 두었는데 동쪽 방이 1 간이요 서쪽 방이 2간이다. 재실 앞쪽에는 별도로 동재(東寶)와 서재(西寶)를 건립하니 각각 3간인데 동재의 편액(扁願)은 추사당(追思堂)01라 하고 서재 익 편액은 정화당(情話堂)이라 하였다 나아가 그 남쪽에는 다시 문사(門舍) 3간을 짓고 편액을 내의문(來嚴門)이라 하였다- 바록 규모는 간략하게 갖추 었으나 이른바 ‘그런대로 완전하고 아름다운(월完월美)’ 집이 된 것이다. 우성(佑成)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오늘날 세속(世洛)의 기호(탤好)가 크게 변 하여 오로지 물질(物質)만을 숭상한다. 옛 성현(聖賢)들이 인륜(人倫)의 가강 (紀網)을 유지함으로써 서l상의 가르침을 확고하게 세우고자 한 일이 모두 황 펴l함을 면하지 못해, 지각(知覺)이 있는 인사(人士)들이 자나 깨나 걱정하고 탄식응 한다. 이에 오늘 박씨 일문(-門)이 먼 조상을 추모하여 근본(根本)을 강는 도랴(道理)를 나타냄에 있어, 마음을 합하고 힘을 모울 수 있는 젓은 생각건대 조상을 높이 받들어 친족 간에 도타운 화목(和健)을 한 때문이지, 한 지방으l 본보가로서 만들었다연 어찌 그것이 아름다울 수 있었겠는사 옛 사람들이 ‘아침 해 뜨는 동산에서 봉이 울었다(鳳嗚朝陽)’고 한 말을 겼는데, 이재 이 봉양(鳳陽)의 편액이 그것으로 흑 내세(來世)의 상서로 운 조가 되지 않겠는가- 이얘 기문을 삼는다. 냐 D 지。 鳳陽驚重-建 上、梁 文 嘉樹故縣、 山秀而川蘇。 述夫固빠밝첼佳城、 松줬以棒驚。 購沈以初創 。 紹士心 而重成 賢祖之露뾰煩 不混 、 肯짧 之바宗 薰댐」 深 、 tÆ j堆 뼈샘 古 jA 團日 參判뻐뻐 堂朴先生 2005년 을유(ζ명) 대서절(大暑節)에 대한민국학술원회 원(大韓民國學術院會員) 성 균관대학교명 예교수(成均館大 學校名활敎쩔) 되겨l학연구원장(退홉學뻐究院長) 민속문화추진회장(파族文 化推進會長) 문학박사(文學博士). 여주(醫)‘11) 이우성(李佑成) 가(記) - 38 ~ 精爽樓於 經營注乎 吉區 。 內舍 。 표日 [닙 先祖 今也雲仍 收火 爾時流增輝 。 況 若祖先視據 。 不第盡펴띠 一 遠之道 。 且 能行宗聖之「 피때 。 매바忠關公松隱先生其嚴君。 麗澤人比白꼼田世之 以文忠公團隱先生寫師父。講討者都聖人之 名碩、若-治隱關隱及春享。 行誼甚備而尤驚於孝友、服喪而哀顆歸禮文。給 經書、乃詩書春秋井禮樂。節操難容以竟件T 十」權好、調뽑以짧爛遺憂滿싸。 途 훨田經編而不得其展布。 沈戰퍼典瓚、不知老之將至。 與子稱 一 代之優、觀不廳柳。 歸田園以總意於住官。訓連子弟、自圖業之꺼購。 젊밝뼈샘 二口띠之縣、世爭觀榮 。 著述幾熾於유存仍之兵쫓中。 體觀安於鳳基之龍}{、距居址不甚週 。 및限주相똥限 훤 路、起 精神續-寬乎公私之文歡裡。 享火奉於新꽃之-洞、由士論之峰發。 T 十」養千」購、奈 械楊如見之思。有誠戀則事可達。유 一 흡 一 죠衣問孫、했先網演樣。 明總靜觀、優然見 齊宿拜歡之響。或權選而憂不須。條뺏뼈뺏짧깨舍、究竟口主바따·容。 4 況廳爛껏올土、讀如成 精靈之斷降。不忘著存、左如在右如在。 #삐 花樹之團綠木。 益戀敎睡、聚於斯歌於斯。 賢、 - 3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