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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12월31일 월요일 6 (제144호) 기 획 필 자 는 경 애 왕 과 대 척 점 에 서 있 는 김 부 일 가 의 동 향 을 추 적 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앞서 김부의 증조, 민공의 정치적 입 장과 면모를 서술한 바 있다.특히 김부의 증조,민공의 행위 전 반에는 의문점이 많다.민공이 헌강왕에게 말한 태평성대는 허 구였으며,정치적기만행위였다. 헌강왕 4년(878) 12월 11일, 12월 24일, 대재부 관내 전체에 는 신라 해적의 준동을 염려해 위수령이 발동되고 있다(븮일본삼 대실록븯(日本三代實錄),권34878년조).헌강왕 7년(881)11월 9일에 는 실제 생계에 어려움을 겪던 신라인들이 배를 타고 구주로 와대재부의공면(貢綿)을약탈하였다. 귀족들은 권력을 앞세워 전지의 탈점, 장리 등의 수단으로 재부를 축적했고 승려 역시 신도의 신앙심에 편승해 기진, 시 주 등 갖가지 편법을 활용, 부를 늘려나갔다. 879년(헌강왕 5 년)일개 승려였던 지증이 500결이나 되는 전지를 봉암사에 희 사한 것에서,거꾸로 승려의 착취와 갹출이 어떠했을지 짐작된 다. 왜냐하면 그 전지는 지증이 상속받은 것으로는 보기 힘들 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도 처용의 처가 어여쁨을 탐낸 외간 남자와통정하는등퇴폐적향락이절정에달했다. 민공은 이와 같은 현실을 헌강왕에게 직언하지 않았다.그의 답변은 다분히 정치적 입장이 반영된 결과였다. 그는 직언을 통해 현실을 고치기보다,권력에 영합하여 사욕을 추구하려 했 던 인물의 전형이었다. 아무튼 헌강왕대 6년 이후의 정국이 민 공과 같은 권력 지향적 존재의 등장으로 채워지고 있음은 주목 된다.민공은 시중에 재임하면서 헌강왕의 정치를 어떻게 보좌 했을까.다음의기록이그것을이해하는관건이된다. 븮그 때 산신이 춤도 추고 노래 부르기를, 지리다도파도파(智理多都波都 波)라했는데, 도파라고한 것은대개지혜로 나라를다스리는많은사람들 이 미리 사태를 짐작 하고 도망하여 도읍이 장차 파괴된다는 뜻이다.븯 즉, 지신과 산신은 장차 나라가 멸망할 것을 알았기때문에춤을 추어 이를경 계한 것이나, 나라 사람들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상서(祥瑞)가 나 타났다하여술과 여색을즐김이 더욱 심했으니마침내나라가망하고 말 았다.(븮삼국유사븯권2기이2처용랑망해사) 위의 자료를 보면 신라 안에서 현실에 대한 불만이 담긴 참 요가 퍼지는 상황이었음이 짐작된다. 븮삼국사기븯에서 이에 상 응하는기록은헌강왕5년이된다. 5년3월,왕이 동쪽의주군을순행하였는데,어디서왔는지알 수없는사 람넷이 왕의수레앞에와서노래를부르고춤을추었다.그들의모양이 무 섭고 차림새가 괴이하여, 당시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산과 바다에 사는 정령이라고 하였다.[고기에는 이 사건이 왕위에 오른 첫해에 일어난 일로 기록되어있다.](븮三國史記븯신라본기11헌강왕5년3월조) 민공이 헌강왕에게 공전의 태평이 왔다고 말하기 불과 1년 전 신라가 망하리란 참요가 나라 안에 퍼졌다는 말이 된다. 민 공의말이허구였음이다시한번그대로드러나는셈이다. 민공은 신라의 피폐한 현실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이 후 헌강왕과 중신들은 ‘술과 여색에만 탐닉했다고 한다. 이듬 해(881)에는 임해전에서 대규모 파티가 열리기도 했다. 7년봄 3월,왕이 임해전에서여러신하들에게연회를베풀었다. 술기운 의 오르자 왕은 거문고를 타고, 신하들은 각각 가사를 지어 올리면서 마음 껏즐기다가헤어졌다.(븮三國史記븯신라본기11헌강왕7년3월조) 일연은 앞에서 헌강왕대의 이런 안일과 방종이 망국의 원인 이라 규정하였다.그리고 이 실정(失政)의 핵심에는 시중의 신 분으로헌강왕을보좌한김부의증조,민공이있었다. 헌강왕은 왕위에 오른 지 12년이 지난 886년 6월, 병석에 눕 더니 약 한 달만인 7월5일 죽었다. 아들로는 돌이 채 지나지 않 은 요가 있었다. 헌강왕의 동생 정강왕이 즉위했으나 1년 만에 요절하고 여동생 만(曼)이 진성여왕으로 즉위했다.이 과정에 서 김부의 증조 민공의 자취는 나타나지 않고, 김부의 조부 인 경에관한편린만이전한다. 효종(랑)은 당시 제 3재상인 서발한 인경의 아들로서 아명은 화달이었 다. (븮삼국사기븯권48 열전8 효녀지은) 위 기록을 보면 인경은 3재상이자 서발한이다. 재상은 김춘 추와 관련된 기록에서 처음 발견된 이래 권력 장악의 예비 후 보자들이 거치는 일급의 중요 관직이다(木村誠,〈新羅の宰相制 度〉, 븮人文學報븯, 東京道立大學, 1977). 신라에선 상재상(上宰相), 차재상(次宰相) 이재(二宰)등 제3재상으로 등급이 지워져 있 고 대개 상대등, 시중, 병부령, 사신 등의 직에 있는 사람이 재 상의 직책을 겸했다. 그렇다고 해서 양자 사이에 필요븡충분조 건이 성립한 것은 아니었다(한국정신문화연구원, 븮역주삼국사기븯, 주 석편하,p.667, 804). 서발한은 이벌찬,이벌간,우벌찬,각간,각찬,서불한 등으로 불리며 신라 17관등 중 1위에 해당한다. 인경의 정치적 권력이 이러했다면 아울러 막대한 재력까지 지녔다고 짐작된다. 이와 관련하여신당서의재상과관련한다음구절이참고가된다. 재상가에는 녹이 끊이지 않고 녹이 끊어지지 않으며 노동(奴 뚝 )이 3천 이며갑병(甲兵)과 소, 말, 돼지의수도이에맞먹는다. 가축은해중의산에 방목을 하였다가 필요한 때에 활을 쏘아서 잡는다. 곡식을 남에게 빌려 주 어서 늘리는데 기간 안 에 다 갚지 못 하 면 노비로 삼아 일을 시킨다. (븮 신당 서븯권236열전145동이전신라) 위 기록에 의하면 재상가의 노동이 3천으로 나타난다. 갑병 의 숫 자 또 한 그 와 근 사 했 다 . 노 동 ( 奴 뚝)의 수와,3천의 갑병을 합치면 5천의 가병(家兵)을 동원할 수 있다. 여기에다 위에 언 급된 3천의 말을 보태면 재상가는 정기 3천을 보유한 셈이다.3 천에 달하는 소의 뿔과 꼬리에 횃불을 달아 전위로 삼고 그 뒤 후위를 정기 3천이 맡으면 전력은 상상 이상으로 커진다. 재상 가는 혼인이라는 굴레로 서로를 엮어 세력 확대를 기했다. 이 들의영향력은자연막대했을게틀림없다. 인경이 지닌 3재상과 서발한에 무게들 둔다면, 헌강왕 이래 정강왕,진성여왕에 이르기까지 김부 일가가 핵심 세력의 지위 를계속유지했던것이분명하다. 인경과 효종 부자의 세력은 실제로 확인이 가능하다.효종과 관련한기록에서이집안의세력이단적으로확인된다. 효종랑이 지나가다가그것을보고돌아와서부모에게청하여자기집곡 식1백석과 옷가지를실어다주었다.또한 그녀가몸을판사람에게몸값을 보상해주고양민으로 만들어주었다. 이 소식을들은낭도몇천명이(郞徒 幾千人)각각곡식1섬씩을주었다. (븮삼국사기븯권48 열전8 효녀지은) 효종랑이 남산포석정에서출유하니문객들이 모두달려왔으나두사람 이 늦게왔다.이에효종랑이 그 까닭을묻자그들이 대답했다. 뷺中略… 서로 껴안고울고있었습니다.이것을구경하느라고늦었습니다.뷻 효종랑은측은하여곡식1백곡을보냈다. 낭의양친도옷 한 벌을보냈으 며, 수천의 낭들도(郎之千徒) 조 1천석을 거두어 보내 주었다. 진성여왕은 곡식 5백석과 집 한 채를 내려주고 군사를 보내 그 집을 호위해 도둑을 막 게 했다. 또 그 방리를 표창해서 효양리라 했다. 그 뒤에 그 집을 희 사해서 절로 삼고양존사라했다.(븮三國遺事븯권5효선9 貧女養母) 위에서 효종은 화랑으로 나타난다. 그 무리는 ‘천도(千徒)’ 또는‘기천(幾千)’이었다.‘기’가도대체얼마를뜻하는것일까? 븮대한화사전(大漢和辭典)븯4卷, p.3947~3948의 기(幾)에 관한 용례를 보면 기는 여러, 또는 수 數 를 의미함을 알 수 있다. 기 천을 수천 또는 몇 천이라 해석한 선례도 있다 (이재호, 삼국사기, 광신출판사, 1997, p. 764). 한데 다음을 보면 효종은 결혼조차 않 은어린나이였다. 효종(랑)은 당시 제삼 재상인 서발한 인경의 아들로서 아명은 화달이었 다. 왕이 생각하기를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어른스러운 면이 있다고 여겨 즉시 형 헌강왕의 딸을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다. (븮삼국사기븯 권48 열전8 효녀지은) 미혼의 젊은 효종이 수천의 낭도를 거느렸다는 것은 어떤 의 미일까?화랑은 도대체 몇 명의 낭도를 거느렸을까?그 사례가 있다. 제32대 효소왕(孝昭王) 때에 죽만랑(竹曼郞)의 무리 가운데 득오(得烏) 급간(級干)이 있어서 풍류황권(風流黃卷)에 이름을 올려놓고 날마다 나오 고있었는데, 한 번은 10일이 넘도록 보이지 않았다. 중략…이에 떡 한 그 릇 과 술 한 병을 가지고 좌인(左人 우리말 에 개질지皆叱知라는것이니이 는 노복奴僕을 말한다)을 거느리고 찾아가니 낭(郎)의 무리 137명도 위의 (威儀)를갖추고따라갔다.(븮三國遺事븯권2기이2효소왕대죽지랑) 위의 죽만랑은 죽지랑이다.그의 아비는 진덕여왕 때 대신회 의의 구성원 6인 중 한사람이었던 술종述宗이다. 죽지 역시 진 덕여왕 3년(649) 8월, 장군으로서 도살성 전투에 참여하였고 동왕 5년(651) 2월에는 파진찬으로서 집사중시(執事中侍)가 되었다. 문무왕 원년(661) 7월 17일에 귀당(貴幢) 총관이 된 후 백제 부흥군을 토벌하였고, 동왕 8년(668) 6월 21일에는 경 정(京停) 총관으로서 고구려 원정에 참여하였으며, 백제 고지 (故地) 점령 및 동왕 11년(671) 6월의 나당전쟁에서도 군공을 세웠다. 이처럼 빼어난 가문에 무용마저 갖춘 죽지가 거느린 낭도가 137명이었다. 그렇다면 어린 효종이 수천 낭도를 거느 린 것은 흔한 예가 아니다. 이에는 필시 아비 인경의 영향력이 후광으로작용했을게틀림없다. 김부의 아비 효종은 경애왕의 아비 신덕왕과의 왕위 계승 다 툼에서 밀려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둘 다 헌강왕의 사위이기 도 한 효종과 신덕왕의 다툼은, 세월을 뛰어넘어 아들인 김부 와경애왕과의다툼으로이어진셈이다. 한데 효종의 활동은 븮삼국사기븯에 보이는 반면,즉위 이전 신 덕왕에 대한 흔적은 찾아 볼 수 없다.활발한 활동을 보인 효종 은 왕위에 오르지도 못했고, 아무런 활약상이 보이지 않는 신 덕왕이 어떻게 국인의 지지를 얻어, 김씨인 효종을 제치고 왕 위에 올랐던 것일까? 그에 관한 해답은 지금으로선,활약이 보 이는 효종을 통해 추적할 수밖에 없다. 효종과 관련한 위 대목 에서 눈여겨 볼 것은 문객이다. 문객은 낭도와는 또 다른 말로 책략, 또는 모략을 안출하는 일군의 세력을 뜻한다. 이에서 효 종이 가병家兵 외에 상당한 정도의 참모를 두었음이 확인된다. 두 문객은 지은과 관련한 일로 포석정 회합에 늦었다. 한데 효 종은 두 문객을 문책하지 않고 동조하여 지은을 구휼했다. 효 종의행동은두문객에대한신임을보여준다. 여기서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두 문객은 왜 회합을 어기 면서까지 지은에게 관심을 보였을까?그들은 지은에게 일종의 동정심을 느꼈던 것일까? 그렇게 보긴 어렵다. 왜냐하면 당시 민생은극도로궁핍했기때문이다. 진성여왕의 치세는 흉년과 기근이 이어졌었다. 나라의 창고 는 비었고 국용이 궁핍해졌다.889년에 이미 나라 안 여러 주와 군이공물과부세를바치지않는등이반이노정되고있었다. 3년, 국내 여러 주와 군에서 납세를 하지 않아 창고가 비고 국가 재정이 어려워졌다. 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독촉하였다. 이로 인하여 도처에서 도 적이 봉기하였다. 이 때원종븡애노등이 사벌주에웅거하여반란을일으켰 다. 왕이 내마영기에게 명령하여 그들을체포하게하였으나, 영기가반도 의보루를보고두려워하여진군하지못했다. (븮삼국사기븯 권10신라본기1 0진성여왕3년조) 그렇다면 지은은 특별한 후과(後果)를 입을 예가 아니다.그 럼에도 왜 지은만이 분외의 포상을 받게 된 것일까? 이에는 어 떤 정치적 저의가 담겨있는 것은 아닐까? 당시 진성여왕의 정 치가어땠는지부터살펴보면그해답을찾을것으로생각된다. 왕이 원래부터각간위홍과 간통하고있었다.중략…위홍이 죽자혜성대 왕이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이후로 왕은 젊은 미남자 두세 명을 남몰래 불러들여 음란하게 지내고, 그들에게 요직을 주어 나라 정사를 맡겼다. 이 에 따라 아첨하고 총애를 받는 자들이 방자하여지고, 뇌물을 주는 일이 공 공연하게 행해졌으며, 상벌이 공평하지 못하고 기강이 문란해졌다. (븮삼국 사기븯권10신라본기10진성여왕2년조) 위에 의하면 진성여왕은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위홍과 간통 했고, 위홍이 죽은 후부터는 미장부 두세 명을 몰래 불러들여 음란하게 지냈다. 진성여왕이 잠통한 미장부는 도대체 누구일 까?신라에서미장한소년들에관한기록이찾아진다. 당나라영고징의븮신라국기븯에는“귀인의자제중에서훌륭한 자를선발 하여 곱게 꾸민 다음, 이름을화랑이라 하여 백성들이 모두떠받들어 섬겼 다.”라고기록되어있다.(븮삼국사기븯권4진흥왕37년조) 화랑도와 관련한 기록에서 미모의 남자라는 말이 확인된다. 진성여왕이 잠통(潛通)한 대상 역시 미장부로 나타난다. 뭔가 둘 사이엔 연관된 느낌이 든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미 지적 된바에의해서도이러한짐작은사실로드러난다. 동왕 2년 위홍이 졸거한 다음에 2ㆍ3인의 미장부들을 비밀히 불러들여 그 들에게 요직을 주고 국정을 맡 기기까 지 하 였다고 한 다. 이 것은 진성여 왕이 화랑세력에의탁하려했던의도로 파악할수있다. 원래경문왕의가 계는 화랑세력과 관련이 깊다. 경문왕이 화랑출신이었음을 비롯해 대대 로 왕권의 기반은 화랑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배용, 븮신라하대 왕 위계승과 진성여왕븯,븮천관우선생환력기념사학논총븯,1985,p.357) 위 견해대로 진성여왕이 화랑 세력과 결탁,또는 잠통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 화랑 세력은 구체적으로 누구라고 할 수 있 을까. 진성여왕 치세를 통틀어 화랑은 효종만이 확인된다. 또 효종은진성여왕에의해헌강왕의딸과결혼까지한다. 효종(랑)은 당시 제삼 재상인 서발한 인경의 아들로서 아명은 화달이었 다. 왕이 생각하기를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어른스러운 면이 있다고 여겨 즉시 형 헌강왕의 딸을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다. (븮삼국사기븯 권48 열전8 효녀지은) 그렇다면 진성여왕이 의탁하고 가까이 한 세력은 효종이었 다고 할 수 있다. 진성여왕과 화랑 효종과의 사이에는 뭔가 깊 은 관련이 추정된다. 뒤집어 말해 진성여왕의 색황에 효종이 핵심역할을했다는말이기도하다.그결과는어떠했을까? 위 기록에서는 아첨하고 총애를 받는 자들이 방자하여지고, 뇌물을 주는 일이 공공연하게 행해졌으며,상벌이 공평하지 못 하고 기강이 문란해졌다고 한다.그렇다면 진성여왕 실정은 효 종의 화랑도에 뿌리를 둔 셈이 된다. 효종 무리의 발호에 대한 반발은금세일어났다. 누군가가 이름을 감추고 시정을 비방하는 말을 만들어 관청 거리에 방 을붙였다. 중략 …왕이 명령을내려거인을체포하여서울 감옥에가두고 처벌하려 하였다. 거인이 분하고 원망스러워, 감옥 벽에 글을 썼다. 중략 …그날 저녁갑자기구름과 안개가덮이고번개가치며우박이 내렸다. 왕 이 두려워하여 거인을 석방하여 돌려보냈다. 3월 초하루 무술에 일식이 있었다.(븮삼국사기븯권10신라본기10진성여왕2년조) 벽서를 통한 저항이 일어났고, 합천에 사는 거인이 구금됐 다. 이것은 여왕과 측근 효종의 강경한 대응일 것이다. 그 결과 정국은평안을되찾았을까? 거인을 희생양으로 삼아 정국을 수습하려 한 노력은 무위로 끝났다. 성난 민심이 강경한 억압으로 진정될 리 없는 법이었 다.5월에는 심각한 가뭄이 있었다.이듬해 상주의 원종과 애노 가 분노한 농심(農心)을 하나로 묶어 반란의 기치를 들었다. 당시의참상을최치원은다음과같이적고있다. “전쟁과 흉년 두 재앙이 중국을 떠돌더니 동쪽으로 건너왔다. 그 상황 이 험악한 중에더욱 험하다. 굶어죽고싸우다죽은주검이 들판을뒤덮고 있다. 중략 …천지가 온통 난리로 어지러워 모든 산천은 전쟁터가 되었다. (최치원,븮해인사묘길상탑지븯,역주한국고대금석문권3,p.337~345) 893년에도 역시 흉년이 들었다. 도적이 사방에서 횡행했다. 하정사(賀正使) 최치원조차 입당하지 못했다. 수상과 육상 교 통이마비되어물에는배가없고육지에는수레가끊어졌다. 894년 9월 5일 신라 해적 수백이 45척의 배를 타고 대마도를 습격했다.9월 17일 일본의 문실선우의 군대와 격돌,그 와중에 302명이 목숨을 잃고 11척의 배와 활, 태도(太刀), 방패 등 각 종 무기를 빼앗기고 10월 6일 퇴각했다.당시 붙잡힌 신라 해적 가운데현춘을공초한내용이실려있다. 계속된 흉년으로 곡식이 여물지 않고 창고는 모두 비어 왕성이 불안하 다. 왕의명령으로 이렇게대마도에와 곡견을빼앗게 되었다.(권덕영, 븮신 라하대서ㆍ남해지역의해적과 호족븯,븮한국고대사연구븯41,2006,p.310) 노략질을 부추긴 원흉으로 진성여왕이 거론된다. 895년에 해인사의 대덕(大德) 훈진이 벼 한 단씩 얻어 떨어진 군량을 충당했다. 그러니 민생이야 말할 나위가 없다. 도적은 서라벌 왕도의서쪽모량리마저약탈했다. 진성여왕 치세에 있어 경제 붕괴는 단절적븡일시적이 아닌, 지속적현상이었다. 진성여왕 치세에 일어난 실정은 일파만파로 퍼져 갔다.이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여론을 무마, 호도하려면 특단의 조치 가 필요했다.그 과정에서 지은이 여론의 호도용으로서 선택됐 다고 여겨진다. 이런 관점에서 지은의 얘기를 다시 찬찬히 뜯 어보자. 효종랑이 남산포석정에서출유하니문객들이 모두달려왔으나두사람 이 늦게왔다.이에효종랑이 그 까닭을묻자그들이 대답했다. 뷺분황사 (芬皇寺) 동쪽 마을에 여인이 있는데 나이는 20세 안팎이었습니다. 눈이 먼어머니를껴안고서로 통곡하므로 같은마을 사람에게그 까닭을물으 니,말하기를'이 여자는집이 가난해서빌어다가어머니를봉양한 지가이 제 여러 해가 되었는데 마침 흉년이 들어 걸식해 살기도 어렵게 되어 이에 남의집에가서품을팔아곡식30석을얻어서주인집에맡겨놓고일을했 습니다. 날이 저물면쌀을가지고집에와서밥을지어먹고어머니와같이 잠을자고,새벽이면주인집에가서일을했습니다.이렇게한 지며칠이 되 었는데그 어머니가말하기를전일에강비(糠粃)를먹을때는마음이 편하 더니 요새 쌀밥을먹으니 창자를 찌르는 것같아 마음이 편안치 못하니어 찌된 일이냐고 했습니다. 그 여인이 사실대로 말했더니 어머니는 통곡하 는것이었습니다. 이에여인은자기가다만 어머니의구복(口腹)의봉양만 을하고색난(色難)을하지못함을탄식하여서로 껴안고울고있었습니 다.이것을구경하느라고늦었습니다.뷻 효종랑은측은하여곡식1백곡을보냈다. 낭의양친도옷 한 벌을보냈으 며, 수천의 낭들도 조 1천석을 거두어 보내 주었다. 진성여왕은 곡식 5백석 과 집 한 채를 내려주고 군사를 보내 그 집을 호위해 도둑을 막게 했다. 또 그 방리를표창해서효양리라했다. 그 뒤에그 집을희사해서절로 삼고양 존사라했다.(븮三國遺事븯권5효선9 貧女養母) 효녀 지은은 한기부 백성 연권의 딸이다. 그녀는 천성이 효성스러웠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어머니를 모셨다. 나이 32세가 되어도 시집 을가지않고어머니를보살피기위하여곁을떠나지않았다. …중략… 어 머니가말하기를“나때문에너를종이 되게하였으니차라리빨리죽는편 이 낫겠다.”고하면서소리를내어크게우니딸도따라울어서그 슬픔이 길가는사람들을감동시켰다. 효종랑이 지나가다가그것을보고돌아와서부모에게청하여자기집곡 식 1백 석과 옷가지를 실어다 주었다. 또한 그녀가 몸을 판 사람에게 몸값 을 보상해 주고 양민으로 만들어 주었다.…효종(랑)은 당시 제삼 재상인 서 발한 인경의 아들로서 아명은 화달이었다. 왕이 생각하기를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어른스러운 면이 있다고 여겨 즉시 형 헌강왕의 딸을 주어 아내 로 삼게했다. (븮삼국사기븯권48 열전8 효녀지은) 위의 자료들은 모두 효종과 지은의 관계를 담고 있다. 븮삼국 사기븯는 효종이 효녀 지은을 견문한 나머지 선행을 베풀었고, 낭도들이 동참했다고 했다. 븮삼국유사븯에선 포석정 모임에 참 석하려던 효종의 문객을 통해 효종,인경,낭도,왕까지 구휼에 동참한 것이 확인된다.앞서 얘기한 대로,븮삼국사기븯는 포석정 관련부분을의도적으로삭제한느낌이짙다. 일단 지은의 집은 분황사 동쪽 마을, 한기부에 있다. 지은의 나이는 스물, 32세로 달리 나타난다. 일가 구성원은 지은과 눈 먼 어 미 둘 뿐 이 다 . 지 은 이 걸 식 으 로 어 미 를 봉 양 한 점 에 서 딸 린전토가없었고,가세는빈곤했을것이다. 따라서 그녀의 집은 기와집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왕경 안에 머물러 있다. 왕경 안이 기와집뿐이며 숯으로만 밥 을 해먹고 노래가 끊어지지 않았다는 헌강왕 때의 태평이 채 1 0년도 지나지 않아 바뀐 것인지, 헌강왕 때의 태평이 처음부터 조작된것인지여기서확인할길은없다. 아무튼 지은은 종래 걸식으로 줄곧 어미를 봉양했으나 이마 저도 어렵게 된 것으로 나타난다. 지은은 몸을 팔았다고 했는 데 실은 이것이 매춘은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여왕이 효종은 혼인시키면서 지은을 혼인시키지 않은 까닭과 노모가 보인 통 곡 섞인 눈물과 회한은 진정 지은의 매신을 매춘의 관점에서 볼때더잘이해할수있다. 기아로 아사자가 속출하는 상황에서,남자도 아닌 여인의 노 동력이 10여 석이나 주고 거래됐다는 것부터 괴이하다.궁핍하 고 절박한 처지의 지은이 제대로 된 계약에 체결했을지도 의문 이 든다. 가장 원초적인 여인의 노동력은 성을 매개로 한 매매 행위로서,작금에도 빈곤한 가세로 말미암아 몸을 팔고 색주가 로 전락, 전전하는 여인의 참담한 실상은 흔히 있는 일이다.김 유신이 만난 유곽의 천관처럼, 지은은 그녀가 처한 경제적 상 황으로 말미암아 어둠의 처녀로 전락한 셈이 된다.그런즉 위 1 0여석또한색주가의‘선불금’을떠올리게하는대목이다. 여왕과 효종 일가의 포상은 상식을 뛰어 넘는다. 왜 횡재에 가까운 은전을 여왕과 효종,낭도들은 베푼 것일까? 이를 문면 그대로해석,효종일가의선행으로만본견해가있다. 눈먼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몸을 팔았던 가난한 여인의 애처로운 사 연이 그 자리에 모인 모든 낭도들에게 전달되었고, 이는 효종을 비롯하여 그 자리에모였던낭도무리의마음을크게자극하였을것이다. 효종은 1백석과 옷가지를 전해 주었으며 아울러 그녀의 몸값을 보상해 주고양민으로 만들어주었다.이것만으로도지은에게베푼은혜는충분한 것이라고 할 수있다. 그러나 지은에게 쏟아진은덕은여기에머물지 않았 다. 그의 낭도 수천 명이 각각 곡식 1석씩을 모아서 주었다고 하였으니, 그 총액은 수천 석에 이르는 막대한 것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라 1,000 석이라해도그 양은결코적은것이 아니다. (삼국)사기에서는당시지은의 몸값을10여석이라고하였으므로 거의100명의노비를살수있는금액이 다. 지은의구휼은효종의개인적인시혜에머문것이 아니었다. 효종과 함 께 하였던 그의 수천 낭도들이 빠짐없이 함께 참가하였던 것이다. 이는 전례 없는 일로써 왕경의 수천 명 청년이 참여한, 거대한 사회운동에 필적 하는 규모이다. (전기웅, 븮진성여왕대의 화랑효종과 효녀 지은 설화븯, 븮한 국민족문화븯23,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2005,pp.214~215) 위에선 효종 무리의 선행을 그저 단순한 선행으로만 보았다. 과연 그럴까.효행으로 유명한 손순이나 향덕에게도 이런 횡재 는 없었다. 노모를 위해 아이를 땅에 묻으려 했던 손손이나,자 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노모를 공양한 향덕 보다 지은의 효행 이과연뛰어나다고하긴어렵다. 국가의 창름조차 비는 국가 붕괴의 상황이었다.따라서 수천 석 곡식을 개인에게 구휼한 것은 해괴하기 그지없다. 곡식을 지은 일가에만 주었고, 게다가 군사를 동원, 지켰다는 것은 주 민과의곡식공유를막았다는것이된다. 어찌하여 기아로 말미암아 생사의 기로에 허덕이던 절대 다 수의 백성은 안중에도 없이 이처럼 비합리적이고 무모하게 지 은 일가에게만 구휼이 선택적으로 집중된 것일까.효종의 시혜 는 효율적이지도 객관적이지도 않다. 형평성마저 크게 결여되 어 있다. 그런즉 선행을 선행으로만 본 해석이야말로 기록의 맹신에 입각한 맹목적인 이해이자 추론이 아닐 수 없다. 상식 의 범주를 뛰어넘는, 필요 이상의 호의와 선행에는 거꾸로 뭔 가 석연찮은 의혹이 내재해 있으며, 외려 이 선행이야말로 효 종 무리의 잘못을 은폐, 호도하려 한 움직일 수 없는 반증이라 여겨진다. 경애왕(신라55대왕.재위924~927) 뱚역사비정(24) 뱛Ⅰ.헌강왕대의정치상황 박 순 교 뱛Ⅲ.민공과신라의몰락 뱛 Ⅳ.김부의조부,인경 뱚▶다음호에계속 뱛Ⅱ.민공의자세 뱛Ⅴ.효종의가세(家勢) 뱛 Ⅵ.진성여왕의실정과효종 뱛Ⅶ.‘지은’얘기가전하는진실 목 차 뱚Ⅰ.헌강왕대의정치상황 뱚Ⅱ.민공의자세 뱚Ⅲ.민공과신라의몰락 뱚Ⅳ.김부의조부,인경 뱚Ⅴ.효종의가세(家勢) 뱚Ⅵ.진성여왕의실정과효종 뱚Ⅶ.‘지은’얘기가전하는진실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