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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다가 1618년 아들 대수가 광해군의 미움을 사서 유배되자 난정을 항소 하다가 유배당했다. 1631년 인조9년 아들 대수의 상소로 풀리어 고향에 서 만년을 보냈다. 이후 선조24년에 예조판서에 증직(鎭職)되었다. 19세손 한사공 대수는 조선명종 인조시의 대학자인 장여헌의 문인이 다. 어려서부터 덕을 이루었고 겸해서 성학을 연구하였다. 19세에 사마 시에 합격하였고 22세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갑인년 1614년에 정언(正 言)으로 홀로 절개를 세워 기강을 바로잡는 의논을 높이 들었다가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인묘 1638년 귀양에서 풀려나 이품 벼슬에 올랐고 이후 부 제학에 이르렀다. • 진설 일 년에 한 차례 음력 10월 16일에는 합천군 대양면 무곡리에 있는 석 천재(石川蠻)에서 당암 강익문 선생 아들인 한사 강대수 선생과 한사 선 생의 아들인 휴징(休徵) 강휘만(姜徵萬) 선생까지 3대에 대한 제를 드린 다. 재실 안에는 단이 만들어져 그 위로 세 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단 과 연결된 단상에 제수를 진설한다. 단상 아래는 제기와 제구 등을 넣어 둘 수 있는 수납함이 마련되어 있다. 그곳에서 미리 꺼낸 둔 제기를 잘 닦 아 올려 진기한다. 제기를 정해진 자리에 진설하는 것을 진기(陳器)라고 한다. 실내에서 제사를 지낼 때는 하루 전에 미리 제기를 진기했으며, 묘 제에서는 진기 없이 바로 진설을 한다. 서쪽을 상위로 하여 맨 서쪽부터 당암 한사 휴징 세 분의 신위가 차례 로 모셔져 있다. 길게 연결된 단상을 세 구역으로 구분하여 제수를 따로 따로 진설한다. 가로가 길고 폭이 좁은 형 태라서 진설도 그에 맞추어 3열 로 진설된다. 1열에는 덩어리로 삶은 수육 잔반 떡의 순서로 진설되어 274 I 예악의 고장 합선의 제례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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