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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11월30일 금요일 8 (제143호) 시군구 지부·관향조 종친회 박씨대종친회 부산본부 해운대구지 부(회장 봉근) 제21차 정기총회가 지난 6일 관내 외식1번가에서본부 임원과 각 구지부 임원, 대의원 47명중 42명 등 70 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히 개최되었 다. 이날 총회에서는 회무보고를 유인물 로 대체하고, 봉구 감사의 감사보고에 이어 결산보고 등을 원안대로 처리하고 임원개선에서는 지난 이사회에서 지부 장에 현 사자 사무국장을 추대하고 이하 임원은 모두 유임키로 함에 따라 만장일 치로 추인하는 등 시종일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40여분에 걸쳐 진행되었 다. 봉근 회장은 대회사를 통해 4년의 임 기동안 음으로 양으로 주변에서 많이 성 원하고 도와준 탓에 대과없이 임기를 마 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창립 45주년을 맞이하는 동안 해운대구지부가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선대 어른들을 생 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며 우리는 이분들 에게 감사를 드리고 또한 긍지를 갖고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이번 임 원 개 선 을 보 면 좀 더 젊 고 패 기 있 는 젊 은 세대로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것 같다 며 단결된 힘으로 해운대구 발전을 위해 도약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을 가져 더 발 전하는 종친회로 거듭나자고 후임집행 부를독려하였다. 진국 본부회장은 이임하는 봉근 회장 의 노고를 치하하고 취임하는 사자 회장 은 여성으로서 남성 종친보다 더 열성적 으로 종사에 참여한 만큼 기대가 된다며 더 잘 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자고 격 려했다. 사자 신임 회장은 지난 4년 동안 화목 과 단합으로 훌륭하게 이끌어준 봉근 회장님에게 감사드리고,여성으로서 부 족하고 한계가 있음에도 지부장이란 중 책을 맡겨주어 걱정이 태산 같다고 말 하고 종친사업이란 일가분들의 적극적 인 참여와 관심이 있을 때 가능한 것으 로 참여의식 확산을 강조하고 인생의 마지막봉사라 생각하고 손발이 달도록 열심히 뛰어다니며 최선의 노력을 다하 겠다며 부족한 부분은 채워주고 잘하는 일은 많은 사람에게 알려 그 힘을 바탕 으로 아름답고 훌륭한 명문 해운대지부 가 되도록 노력하겠다며 취임 포부를 밝혔다. 신임 사자(史子) 회장은 2012년 재무 국장을 시작으로 2014년 사무국장(4년) 을 거쳐 이날 지부장에 추대되기까지 해 운대구지부의 살림을 맡아왔으며, 지역 의 각종 봉사단체를 이 끌어 온 파워우먼 으로 정평이 난만큼 해운대구지부에 새 로운 활력소가 되리라많은 종원들은 믿 는다. 한편 해운대구지부는 1973년 창립되 어 역사가 깊다. 매년 유적탐방과 각 지 부 간 교류, 대내외 행사에 적극 참여하 면서 해운대구지부를 명문가로 올려놓 았다. 부산해운대구지부제21차정기총회 성료 신임박사자회장추대븣전국유일여성회장탄생,뷺인생마지막봉사라여기고최선 다할터뷻 부산해운대구지부 정기총회가지난 6일개최된가운데직전봉근회장이 신임집행부 임원진을소 개하고 있다.(사진 왼쪽부터 준상, 정웅 부지부장, 사자 신임회장, 봉근 직전회장, 동춘, 영구 감사 순) 박사자 회장이 지난 4년의 임기동안 지부발전 을 이루고 퇴임한 봉근(右) 회장에게 공로장을 전달하고고마움을표시했다. 우리 종친사에 유일하게 여성회장으로 취임한 박사자 회장이 회기를 이양받고 힘차게 흔들어 보이면자신감을드러내고있다. 죽음을 무릅쓰고 신비의 복위를 주청 하는 상소를 올려 대의를 지키고 의로움 을 실천했던 문간공(휘 상)의 시향이 지 난 23일 오전11시 광주 서구 절골 마을 선영 묘역에서 종표 현종의 집례로 종률 문간공파종중 회장의 초헌과 열근 판서 공파 총무(대전)의 아헌, 하윤 원로 종 친의 종헌으로 각각 헌작하고 수철 축관 의독축으로엄숙봉행되었다. 문간공의 휘(諱, 이름)는 상(祥), 호 는 눌재(訥齋) 문간(文簡)은 시호이다. 호남지역 입향조 찬성공(휘 지흥(智興, 1411~1489)의 둘째 아들로 광주에서 태 어난 문간공은 연산군 2년(1496) 23세 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501년 정시문과 을과에 급제하였다. 교서관정자(校書館 正字)를 시작으로 조정의 요직을 거쳤 으며 자원하여 담양부사로 나갔으며 충 주목사로 재직할 때 청백리로 선록(選 錄) 되었다. 특히 죽음을 무릅쓰고 신비 의 복위를 주청하는 상소를 올려 대의를 지키고 의로움을 실천했던 인물로도 유 명하다. 시와 문학에 남다른 식견과 조 회가 깊었으며,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특 히 형 하 촌 공 과 아 우 육 봉 공 과 더 불 어 삼형제가 문장으로 세상을 울려 이들을 가리켜 당시 송나라에는 부자삼소(父子 三蘇)가 있고 동국(東國)에는 형제삼박 (兄弟三朴)이 있다고 하였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의리사상을 실 천하였으니 선생이 걸어간 길이 호남인 의 정신이요 사상으로 선생의 뒤를 이으 려는 많은 후학들이선생의 묘역을 찾고 있으며, 지역 서예가들은 선생이 남긴 1 ,200여 시문(詩文)중에서 118여 작품을 묵향으로 표현하는 ‘호남의 인물과 정 신전’이라는 이름으로 오는 29일 오후 5 시 서구 광천동 유스퀘어문화관 금호갤 러리에서전시회를가질예정이다. 종률 회장은 제례봉후 서울 등 원거리 에서 온 종원을 소개하면서 감사의 인사 와 함께 오는 29일 열리는 학정연우서예 전에 많은 관심을 가져줄 것을 당부하고 이번 서예전을 계기로 선조님의 더 한층 선양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한편 선생의 묘역은 조선 초 사 대부가의 봉분 축조형식을 그대로 보존 하고있으며1777년(숭정기원후네번째 정유) 11월 16일 세워진 비석을 비롯한 석물 등은 문화재적 가치가 있어 관할관 청의세심한관리가필요할것같다. 문간공휘눌재박상(朴祥)선생의절의정 신기려 문간공제향제관,왼쪽부터종률,열근,하윤,종표,수철順 선생이걸어간길호남인의정신이요사상 문간공종중 박종률 회장이 초헌관으로 헌작하 고있다. 충주박씨 호남 문호를 연 찬성공 세일 제가 지난 22일 광주광역시 서구 사동 (절골)의 묘역에서 대전의 판서공 종중 의 희조 회장을 비롯한 임원진과 후손 등 70여명이 참례한 가운데 봉행되었다. 소설(小雪)의 절기인 이날은 갑작스럽 게 찾 아 온 한 파 로 올 들 어 가 장 추 운 날 씨임에도 후손들이 추원보본의 정성이 이어진 가운데 하온 남성동문중 회장의 집례로 환규 고문(前 교수), 희조 판서 공 회장, 종률 문간공 회장(前 교수)이 각각 순서대로 헌작하고종우 하촌공 회 장의독축이거행되었다. 제향후에는 장소를 재사(齋舍) 추원 재로 옮겨 정기총회를 개최하고 지난 한 해를 결산하고 새로운 한해의 시작을 설 계했다. 창규 회장은 이 자리에서 부족한 몸으 로 최선을 다하려 하나 뜻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며 지도편달을 당부하고 최 선을다해봉사하겠다고말했다. 찬성공 휘 지흥(智興,1411~1489)은 1 411년 고려조에 성균 진사로 감찰과 좌 랑 의천, 은산군사를 역임한 휘 소(蘇) 와 고령오씨 사이의 오형제중 넷째아들 로충청도회덕에서태어났다.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 한 것에 격분하여 살 곳을 찾아 남으로 내려와 현 광주 봉황산(鳳 凰山)아래 집을 짓고 순수함 을 보전하며 깨끗이 살았다. 그러나 학문이 뛰어남을 알 고 있는 권람이 수차례에 걸 쳐 세조에게 천거하였으나 나아가지 않고 곧은 선비의 삶을살았다. 한편 찬성공 제향 후에는 추원재 옆 하촌공의 재사 추 모재에서 하촌공 종중(회장 종우) 주관 으로제향이이어졌다.하촌공의휘는정 (禎)의 자(字)는 창국(昌國), 호(號)는 하촌(荷村), 찬성공(휘 지흥)의 장남이 다.성균생원으로학문이뛰어나점필재 김종직 선생이 호남을 살필 때 한번 보 고 기이하게 여겨 예모(禮貌)를 차려 말 하기를 “참으로 재상(宰相) 재목(材木) 이다”하였으나아쉽게도31세의젊은나 이에세상을등져아쉬울뿐이다. 충주박씨찬성공파시향봉행및정기총회 성료 김종직선생도반한하촌공제향도이어져 찬성공 묘제광경- 입향600여년의세월을 말해주듯묘소앞 구비(舊碑)의독특함이 두드러진다. 특히정교한 문양이 둘레길의길손을끌어들인다. 찬성공묘제제관,왼쪽부터종률,희조,환규,종우,하온 順 공명(功名)과 영진(榮進)을 멀리하 고 기묘사화(己卯士禍)때 한양에서 전 남 순천의 운곡촌에 이주 향리의 자제들 을 모아 도학을 연구하여 일세(一世)의 사표(師表)가 되었고, 상주박씨가 호남 지역에 뿌리를 내리는 계기가 되었던 선 조의 시향이 지난 22일(음10.15) 전남 순천시 상사면 쌍지리 소재 세장산 묘역 에서봉행되었다. 이날 봉행된 판서공의 휘(諱)는 안례 (安禮, 사벌대군 13세)이고, 조선초 숭 정대부(崇政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 를 거쳐 홍문관 대제학, 지경연 춘추관 사(知經筵 春秋館事)를 역임하고 문효 (諡號 文孝)의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아들 하(遐) 또한 이조판서를 역임하였 고, 손자 기(寄)는 이조참판(吏曹參判) 를 역임하니 역사상 전무후무한 3대 (代)에 걸쳐 홍문관(弘文館)을 지냈으 니가히명문가의대를이었다하겠다. 증손 휘 양선(揚善)은 한성판윤,현손 윤문(允文)은 성균생원이고, 5대손 휘 증손(曾孫)의 호는 운곡(雲谷)으로 도 학이 일세의 사표가 되어 지금의 순천지 역 판서공 후손들은 운곡정사를 중심으 로 순천, 여수, 광양으로 세거지를 이루 면서 큰 집성촌을 이루며 위선사업과 선 영봉사에최선을다하고있다. 한편판서공을비롯한5代祖향사이후 에는 간단한 음복과 점심 뒤에 운곡공의 아들 휘매(梅,병절교위)이하선조 향사 가순천문중을중심으로 봉행되었다. 별절교위공의 아들 휘 매 대붕(大鵬, 호 南浦)은 명종조에 사마시에 급제하 고 벼슬이 주부(主簿)에 이르렀으며 15 98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분연히 일어 나 도처에서 승승장구하였으나 그해 8 월 금산벌 전투에서 장열히 전사하여 선 무원종3등으로책록되었다. 이에 남포공(휘 대붕)의 충절과 운곡 공(휘 증손) 도학(道學)과 도원재(휘 사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호남 사 림의 공의로 조정에 설사(設祀)를 간청 하여 순조27(1827)년 상사면 동백리의 이천서원을창건봉안하게되었다. /사진제공박복근(럭키포토) 상주박씨판서공파시향봉행 판서공을비롯한 5代시향이 순천쌍지리선영합동제단에서지난 22일오전봉행되었다. 판서공파조휘안례아들휘하,손자휘기,증 손휘양선,현손휘윤문순천입향조인운곡공 휘 증 손 등 5 대 (代 ) 판서공제향후남포공묘역에서이하 선조님제 향을모시고있다. “회재 선조 영령께서는 도 덕을 품으시고 예법을 따르셨 네 충의를 널리 펴셔 윤기를 세 우 셨 네 그 명 성 역사 남으셔 영 령이 밝게 조감 하시니 정결히 제사함이 의당 하여 이에 추향 을 맞 아 정 하 고 경건하게 천신을 배푸오니 흠향하소서” 지난 22일 광주광역시 서구 풍암동 소재 벽진서원 의열사에서 낭랑하게 울려퍼 진축문이다. 음성박씨 정승공파 종중(회장 상배) 은 의열사에 배향된 선조 회재 선생의 추모제향을 성련 음성박씨대종회 前 회 장의 집례로 태근 고문(前 광주향교 전 교)의 분향과 강신 전폐례에 이어 초헌 으로 헌작하고 정채 축관의 독축에 이어 외손인 임한택(林漢澤) 유학자의 아헌 과 상우 부회장의 종헌으로 30여분에 걸 쳐엄숙봉행되었다. 이날 제향은 지난 6월 7일 지역 유림 들에 의해 150년 만에 서원이 복원된 뒤 첫 추향으로 종중에서 주관 봉행되어 후 손들의 전통제례문화 답습을 위해 이채 고문을 비롯한 원로분들의 지도아래 소 임을 맡은 집사들이 사전 교육을 받아 질서정연하고정숙하게진행되었다. 회재 박광옥 선생은 1526년 1월 26일 광주광역시 서구 매월동 회산에서 성균 관 사예인 곤(鯤)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음성(陰城)이고 자는 경원(景 瑗)이며회재는호이다. 10세 때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의 문인인 정황(丁 )선생을 찾아 학 문을연마하여21세에소과에합격하고, 향약(鄕約)을 만들어 향리의 예속을 교 화시켰다. 선생의 덕망이 높아지자 44 세에 학행(學行)으로 내시교관을 지내 고 49세에 운봉현감에 제수되었으며 별 시(別試)에 합격해 예조정랑 사헌부지 평과 성절사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 왔고 영광군수 밀양부사 등을 역임한 후 향리에 돌아와 개산송당(蓋山松堂)을 짓고 후진양성에 매진했다.1592년 선생 이 67세 때 임진왜란을 당해 전국이 왜 적에게 유린되어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 화 같았다. 선생은 인근에 살던 고경명 (高敬命) 나주의 김천일(金千鎰)과 의 병을 일으켜 나라와 민족을 구출하자고 다짐하고 의병을 모집해 김천일과 고경 명에게 출전하게 하여 큰 성과를 올리게 하고 뒤에서 의병과군량을 확보하여 그 뒷바라지를 도맡았다. 광주목사 권율 ( 權 慄 )이 천 여 명 의 광 주군사로 이치대 첩을거두고,이어서전라순찰사가되어 만 여 명의 호남의병을 이끌고 북진할 때 군사와군량을공급했으며,대흥사의 승장 처영(處英)을 함께 참여시켜 행주 대첩을 이룩하는데 큰 공헌을 하게 한 것도 선생의 역할이었다.선생은 67세의 고령에도 나주목사에 취임하여 국난을 극복하는데 전념하다가 병환으로 사임 하고 1593년 10월 26일에 별세하여 후학 들은 1602년 회재 선생의 높은 학덕과 절의정신을 추모하기 위해 후학들이 광 주 서구 벽진동에 벽진서원을 향사(享 祀)와 교학(敎學)에 힘써왔다. 그러나 1681년 충장공 김덕령 장군을 추배하고의열사(義烈祠)로사액되었으 며, 뒤에 오두인(吳斗寅) 김덕홍(金德 弘)김덕보(金德普)를 배향 해오다 1868 년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150년만에 유림에 의해 복원되어 춘향 은 지역 유림향사하고 추향은 후손들이 향사를봉행하며선조의음덕을기린다. 회재박광옥선생추모제향봉행 음성박씨정승공파븣벽진서원의열사 벽진서원전경. 회재선생추향제관-앞줄왼쪽부터상우,임한택,태근,정채,성련,뒤줄상배회장 박태근 고문이 초헌관으 로 헌작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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