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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의는 경남 산청(山淸) 출신으로 1908년 80여 명의 의병을 모아 활동하였던 의병장이다. 1908년 6월 입석수비대(立石守備隊)를 습격하는 등 동년 10월까지 경남 산천 등 지리산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7월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으로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된 뒤, 해산 군인들이 대거 의병대열에 참여함으로써 의병투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1908년 1월 13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서울진공작전 실패 이후 각처에서 결성된 의병부대의 활동이 왕성하게 나타났다. 전라도와 경상도의 접경지대인 지리산을 근거지로 삼아 항전하였던 의병부대는 고광순의진(高光洵義陣),김태원의진(金泰元義陣),김동신의진(金東臣義陣),문태서의진(文泰瑞義陣) 등이었다. 1908년 2월 7일 일본군 수비대는 총 85명으로 편성된 소위 '지리산토벌대(智異山討伐隊)'를 편성하여 동년 3월 5일까지 여러 전투에서 많은 의병을 해산시켰다. 그후 지리산 일대에는 이석용의진(李錫庸義陣),이장춘의진(李長春義陣),윤영수의진(尹永壽義陣),장가하의진(張佳夏義陣),박동의의진(朴東義義陣) 등이 항전을 계속하였다. 1908년 창의한 박동의의진은 경남 산청군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던 삼도도원수(三道都元帥) 윤수영의 휘하에서 대장 송가(宋哥)와 대장 손우식(孫佑植) 등과 함께 항전하였다. 박동의의진의 편제는 경남창의대장(慶南倡義大將) 박동(朴東義)의 이하 후군장 장○만(張○滿),중대장 황내청(黃乃靑),도선봉 이학노(李學魯),좌선봉 이만영(李萬永),중군장 양문칠(梁文七),영솔장 김경삼(金敬三),후군장 유명국(柳明國)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908년 6월 11일 박동의가 거느린 의병 약 80여 명은 전북 운봉군(雲峰郡) 입석수비대(立石守備隊)를 공격하였으며, 동년 8월 26일 박동의가 거느리고 있는 의병 약 30명은 지리산 남쪽 기슭에서 하동수비대(河東守備隊) 토벌대 11명과 교전하였다. 그리고 동년 9월 13일 박동의의진은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박동의의진은 운봉,하동 등 지리산 일대에서 일본군에 항전하였다. 동년 10월 17일 산청군 덕산(德山)에 주둔하고 있던 박동의는 진주수비대의 습격을 받고 체포되어 총살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