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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한 선생은, 전남 승주(昇州) 사람이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일찍이 만주로 건너가 독립단, 배달(倍達)청년회 등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고 한다. 1930년 한족자치연합회(韓族自治聯合會)를 모체로 하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이 동북만(東北滿)지역에서 의병, 유림, 대종교 출신 독립투사들을 망라하여 조직되자 그 창립요원의 한 사람으로 여기에 참여하여, 이청천(李靑天) 유동열(柳東說) 김학규(金學奎) 등과 같이 활동하였으며, 그는 선전위원장에 임명되어 조직 및 훈련의 책임을 맡아 노력하였다. 1931년 만보산(萬寶山)사건이 일어나자 이청천(李靑天) 김창환(金昌煥) 황학수(黃學秀) 등은 한국독립군을 일으켜 동북만 각지에서 일군과 전투를 벌였으며, 1932년 3월에 그는 이규보(李圭輔) 이종의(李鍾宜) 등과 함께 아성현 영발둔(阿城縣永發屯)에 주둔하고 있던 중국군 사령관 고봉림(考鳳林)을 방문하고 한중 군사합작을 약속하여 연합작전을 폈다. 한국군 총사령 이청천(李靑天)은 동빈현(東賓縣)에서 고전하였으며, 전세가 불리하여 흑룡강성 통화현으로 퇴각하였는데, 별동대장 안종선(安鍾宣)은 1932년 3월 30일 중국군 부대와 공동으로 아성(阿城)을 탈환하고 이후 수개월간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연합군은 동년 9월 하얼빈과 장춘선의 요지인 쌍성보(雙城堡)를 공격하여 점령하는 전승을 거두었는데, 이후 우군인 중국군의 반란으로 이 성을 다시 적에게 내주게 되는 참패를 당하였다. 이에 독립군에서는 그와 김창환 등을 북만에 보내어 흩어진 사병을 수습케 하고 다시 쌍성보 진격 준비를 서둘렀다. 그리하여 동년 11월 17일에는 다시 성을 공격하여 점령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1933년에 한국독립군은 중국 구국군 총사령 왕덕림(王德林)과 합작공작을 시도하였으나 그는 이미 남경으로 가 버린 뒤라, 총사령 서리 제1사장 오의성(吳義城)과 제14사장 시세영(柴世榮)과 함께 한중 연합토일군(韓中聯合討日軍)을 재조직하여, 동년 4월 영안현(寧安縣) 전투, 동년 6월 대전자(大甸子) 전투 등에서 크게 승리를 거두는 쾌거를 이루었다. 그러나 만주에 일제의 괴뢰정권인 만주국이 수립되고 일군이 만주 전역을 장악하게 되자 독립군은 중국 본토로 이동하게 되었으며, 1933년 5월 낙양(洛陽)군관학교에 특별반이 개설되자 그는 오광선(吳光鮮)과 함께 교관에 임명되었고 총책임자에는 이청천(李靑天)이 취임하게 되어 많은 간부를 양성하였다. 1933년 겨울에는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의열단, 한국혁명당이 통합하여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을 조직하였는데 그는 윤기섭 이청천과 한국혁명당 대표로 통합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대일 전선통일동맹이 1935년 7월 단일대당(單一大黨)으로 창립한 당이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인데 그는 조직부장 김두봉(金枓奉) 휘하에 속하였다. 민족혁명당은 1936년 2월 김창환(金昌煥) 황학수(黃學秀) 이청천 등이 전당비상대표회의를 열어 공산주의자를 배제하고 한국민족혁명당으로 변경하였다가 다시 "조선혁명당"으로 개칭하였으며, 이때 이탈한 김두봉 등은 조선민족혁명당을 따로 조직하였다. 그는 조선혁명당의 상무위원 겸 조직부장으로 활약하였으며, 1937년에는 김구(金九) 이동녕(李東寧) 이시영(李始榮) 조소앙(趙素昻) 등과 함께 국민당, 한국독립당 및 미주지역에 산재한 6개 민족주의단체를 연합하여 일관된 독립운동을 추진하기 위해서 광복진선(光復陣線)을 조직하였는데 그는 항일선전에 주력하는 선전위원회 위원에 선임되었다. 1939년 10월에는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에 선출되어 1944년까지 의정활동에 참여하였다. 또한 1940년 5월에는 중경(重慶)에서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강력한 정당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3당(조선혁명당,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통합운동을 벌여 민족진영의 정당 단체를 연합하여 "한국독립당"을 창립하는 데 기여하였다. 동년 9월에는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의 창군에 참여하여, 총사령부 주계장(主計長)에 임명되어 광복군의 살림을 맡게 되었으며, 같은 해 11월 총사령부가 전방지구인 서안(西安)으로 이동하여 직제를 개편하게 되자 총무처장 대리에 임명되었다. 1941년 12월에는 서안의 중국 국민당이 경영하는 전시간부훈련단(戰時幹部訓練團)에 광복군 장교훈련소를 설치하였는데 그는 송호성(宋虎聲) 나월환(羅月煥)과 같이 훈련책임을 맡았으며, 1942년 10월에는 한국광복군 제2지대 정훈조장(政訓組長)으로 선전업무에 전념하였다. 1942년 말 그는 군적을 떠나, 1943년 3월 20일 국무위원회 부비서장에 임명되었다가, 1944년 2월 국무위원에 선출되었다. 동년 3월 그는 중경에서 개최된 한국독립당 전당대회에서 중앙상무집행위원 겸 훈련부장에 지명되어 조직책임을 수행하였다. 같은 해 10월에는 종전이 임박해 옴을 예견한 국무원에서 국내공작위원회를 구성하여 국내 진입을 위한 준비를 서두르게 되었는데 김구를 위원장으로 하고, 그는 조성환·성주식(成周寔)·김약산(金若山) 등과 동 위원에 임명되었다. 1945년 5월 7일에 그는 최석순(崔錫淳)·이해명(李海鳴)·김약산·염온동(廉溫東)·조시원(趙時元)·양우조(楊宇朝) 등과 독립운동자대표회의 소집을 의정원 의장에게 제안하여 조국광복의 중요문제를 이 회의에서 결정하도록 하여 합법적으로 이를 추진 실현하기 위한 방안을 강구하기도 하였다. 조국 광복 후 그는 제6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