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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장 국권회복운동 83 1편 정치 3절 자정순국 박제순-하야시 억지합의(일명 을사조약)에, 이를 반대하는 의 열‧순국투쟁이 잇달았다. 특히 1910년에 일제에게 강점되자 전국 적으로 자결하는 순국자가 줄을 이었다. 3‧1독립운동에 이르기까 지 대개 70명 정도 인사들이 자결하였다. 이들 가운데 안동 사람 이 10명이나 되어 전국에서 가장 많다. 김순흠金舜欽‧이만도李晩燾‧ 이중언李中彦‧류도발柳道發‧류신영柳臣榮‧이현섭李鉉燮‧권용하權龍河‧김 택진金澤鎭‧이명우李命羽 부부 등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영양출신 김 도현도 스승 이만도의 길을 따랐다. 김순흠(1840~1908)의 자는 치화穉華, 호는 죽포竹圃이다. 그는 풍산 읍 수리에서 태어났고, 이강년의진에 참여하여 활약하였다. 1905년 박제순-하야시 억지합의 소식에 그는 ‘토오적문 討五賊文 ’을 지어 유 림에 배포하고, 중기의병에는 군자금 조달을 위해 노력했다. 1908 년 “내가 죽거든 빈소를 차려 곡을 하기는 해도 상식上食은 하지 마 라. 왜놈 천하에서 자란 곡식을 먹을 수 없으니 국권이 회복되는 날 올리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단식한 지 23일 만인 1908년 9월 순절하였다. 이만도(1842~1910)는 전기의병 당시 예안에서 일어난 선성의 진의 제1대 의병장이었다. 1905년에는 아들 중업中業을 시켜 오적 을 목 베라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다가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에, 그는 단식에 들어갔다. 집안사람들이 함께 단식하며 만류를 하여 도 그의 뜻을 굽힐 수 없었다. 그는 단식 24일 만인 10월 10일(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