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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정치‧행정Ⅰ 74 안동 근현대사2 -정치‧행정- 협동학교의 재원은 호계서원의 재산과 천전 의성김씨 문중을 비롯한 여러 문중의 것이 동원되었다.44) 그래서 우선 내앞마을 의 의성김씨 서당인 가산서당可山書堂을 보수하여 학교 건물로 삼았 다. 호계서원 재산을 여기에 귀속시켰다.45) 이어서 1909년 말에 가 서 백하 白下 김대락金大洛이 그의 사랑채를 학교 교사로 내놓았다.46) 협동학교 개설은 신민회의 신교육운동의 대표적인 결실이다. 이 전의 사립학교들이 초등 수준인 반면, 협동학교는 중등교육을 위 주로 삼았으며, 신민회 차원에서 애국적 인사들을 교사로 파견하 여 국권회복을 목표로 한 교육을 중시하였다. 이 때 협동학교에는 이관직‧안상덕‧김기수 등이 부임해 왔다. 협동학교는 경북 북부지역 계몽운동의 효시이면서, 이 지역에 대한 신민회의 교두보 확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협동학 교는 청년들에 대한 신교육은 물론이고, 지역의 지식인들에게도 영 43) 東山先生紀念事業會, í��東山文稿��, 1977, 144쪽; 실제로 학생들을 모집하고 수업을 시작한 시기는 다음해인 1908년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3년제 중등과정에 1회 졸업생이 배출된 시기가 1911년 봄이었기 때문이다. 44) 《황성신문》1908년 9월 24일자, 「嶠南의 一雷」; “安東郡 東7面에 某名族 이 시국의 풍조를 觀感하며 時務의 필요를 覺知하고 교육사상이 일치분 발하야 동7면이 협력하야 일교를 창설하니 曰協東學校라. 유래 각 문중 과 각 사숙의 유물을 정리하여” 재원을 마련했다고 보도하였다. 45) 東山先生紀念事業會, ��東山文稿��, 1977, 144쪽. 46) 《황성신문》1909년 5월 8일자, 「嶠南敎育界의 新赤幟」; 이 글은 金大洛이 원래 위정척사적인 인식을 지키면서 신교육에 극력 반대하였던 인물이었 으나, 신교육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면서 이에 헌신적인 자세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