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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장 국권회복운동 61 1편 정치 의진 본대는 예안을 출발하여, 이틀 뒤인 3월 28일 전투 대기선인 산양에 도착했다. 태봉 공격에 선성의진이 앞장섰고, 풍기‧영주‧ 순흥의진이 뒤를 따랐다. 종일토록 치열한 전투를 벌이던 연합의 진이 저녁 무렵에는 밀려나기 시작했고, 선성의진도 3월 31일(음 2 . 18) 예안으로 돌아왔다.28) 5월 31일(음 4.19)에는 상계의 퇴계종택이 불타고 이 과정에서 1,400권의 책이 몽땅 잿더미가 되었다. 다음날에는 청량산淸凉山의 청량사淸凉寺와 오산당吾山堂에 불꽃이 하늘을 찌를 듯 올라갔다.29) 의병을 지원하던 집을 불태우고, 의병들이 청량산으로 들어가 진을 치는 과정에서 벌어진 참극이었다. 선성의진의 핵심 구실은 온혜 삼백당출신 이인화의 손으로 넘 어갔다. 2차 선성의진 활동은 6~7월에도 끊이지 않고 있었다. 이 인화는 김도현의진과 줄곧 연합작전을 폈다. 활동 반경도 영양과 청송을 오르내리는 범위였다. 그런데 전투를 벌일 때 무기 차이도 극복하기 힘든 요소였지만, 장마와 무더위도 큰 적이었다. 쏟아지 는 비는 화승총을 사용할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양력 9월에 들어 3차 선성의진이 결성되었다. 이인화가 3대 의 병장으로 나선 것이다.30) 그는 삼백당三栢堂에 의병소를 두었다. 하 1983, 22쪽. 28) 金道鉉, 「碧山先生倡義顚末」, í��독립운동사자료집��2,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83, 25쪽; 李兢淵, ��乙未義兵日記��1896년 2월 18일조. 29) 李兢淵, ��乙未義兵日記��1896년 4월 20일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