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page

Ⅰ정치‧행정Ⅰ 58 안동 근현대사2 -정치‧행정- 을 보내어 해산 명령에 따를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히고, 소백산과 태백산 일대를 이동하면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5월 26일(음 4 . 12)에 왜장倭將이 방자하게도 안동부성 종루에 올라앉아 효유한다 고 떠들었지만,19) 의병의 투쟁은 결코 위축되지 않았다. 안동의진은 태봉전투 패전 이후, 특히 안동이 불바다가 된 이후 에 인적‧물적 지원이 부족해지면서 혹독한 시련에 부딪쳤다. 그 러다가 장마를 거치면서 점차 의진을 운영하는 데 한계를 보였다. 7월 22일(음 6.12) 안동의병의 기를 꺾는 비극이 서후면 금계마 을에서 발생했다. 옹천전투를 벌인 금계출신 포장砲將 김회락金繪洛 과 척후장斥候將 김진의金鎭懿 등이 마을로 숨어들던 다음날, 즉 7월 22일(음 6.12) 새벽에 관군이 금계에 들이닥쳐 김흥락을 끌어내 어 묶고, 가산을 압수했으며, 김회락과 김진의를 붙잡아 갔다. 그 리고 안동부에 들어서자마자 김회락은 곧 총살되고, 김진의는 갇 히는 비극이 발생한 것이다.20) 7월 이후 안동의진에 대한 기록은 미미한 편이다. 안동의진 일 부가 영해전투에 참가했고,21) 7~8월에 200명의 예안의진과 함 께 400명의 안동의진이 연이어 패배했다. 이 무렵, 8월초 안동의 19) 李兢淵, í��乙未義兵日記��1896년 4월 12일조; 종루는 안동의 남문인 濟南樓 바로 안쪽에 있었다. 20) 李兢淵, ��乙未義兵日記��1896년 6월 12일조. 21) 金道鉉, 「碧山先生倡義顚末」, ��독립운동사자료집��2,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83, 3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