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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장 국권회복운동 51 1편 정치 안동부는 의병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었다. 그러자 도망갔던 안 동관찰사 김석중이 다시 쳐들어 왔다. 여기에 일본군 100여 명이 가담하였다. 안동의진 지휘자들이 본부에서 관군의 공격 소식을 접한 날은 1월 26일(음12.12)이었다. 선봉장 김옥서金玉瑞, 중군장 류완柳琓, 우익장 권용현權用賢, 좌부장 이의호李宜鎬 등이 나섰지만 전 투에 패했다. 끝내 안동 시내로 접어드는 송현松峴 고개에서 관군 을 막아내지 못한 의병은 흩어지고 말았다. 안동의병은 그냥 당할 수만은 없었다. 의병장 권세연을 중심으 로 다시 재기에 나서자, 관찰사는 2월 19일(음1.7) 순검 몇 명을 이 끌고 안동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서울을 향해 달아나던 그는 2월 25 일(음1.13)에 이강년李康秊의진에게 붙들려 문경 가은 농암장터에 서 처형되었다.10) 안동향교에 본부를 차린 의병은 군자금 모집에 나섰다. 향회에 서 안동일대의 각 문중과 향교, 그리고 서원별로 나누어 맡을 의 연금이 정해지고, 총액이 무려 2만냥을 넘었다. 당시 안동의 아전 들도 의병에 관한 「안동하리통문安東下吏通文」을 발송하였다.11) 의 병항쟁사에서 아전들의 통문이 알려진 일은 드물다. 3월 7일(음1.24) 의병장 권세연은 다가올 전투를 염두에 두고 10)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운강선생창의일록」, í��독립운동사자료집��1, 1983, 212쪽. 11) 김희곤, 「安東下吏通文 해제」, ��한국근현대사연구��11, 한국근현대사학회, 1999, 310-312쪽(원문, 313-318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