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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1편 정치 1 장 위정척사운동 가장 많이 담당하고 있었다. 여기에 예안까지 합한다면 130냥에 이른다. 척사만인소시에 경상좌도 40개 고을에서 거두어들일 돈 은 985냥이다. 이것은 최소한의 공공경비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이 실제로 거두어졌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우도와 합하고, 여기에 개인적인 경비를 보탠다면, 만인소에는 적어도 수 천 냥 의 자금이 소요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앞의 985냥은 서울 로의 발행發行을 위한 최소한의 경비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특 히 척사만인소의 경우는 여러 번에 걸쳐 복합이 전개되었고, 그 때마다 소수가 먼 곳에 정배되었으므로 수 천 냥으로는 이를 감 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부족한 부분은 이전의 경우와 마찬가지 로 아마 만인소가 종결된 후에 영남 각 읍에 재차 분배되어 거두 어졌을 것으로 보인다.17) 아무튼 만인소라는 형식의 위정척사운동에는 엄청난 인적‧물 적인 자원을 필요로 하였고, 이를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영남 유림이 향촌사회에서 가지는 재지적 기반, 즉 동성촌락과 지주로 서의 공고한 기반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영남 유림의 이 같은 위 정척사운동은 이후 의병항쟁‧항일구국운동으로 승화‧계승되어 나 갔다. 17) 정진영, 앞의 논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