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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장 민주화운동  시기의  안동정치 373 1편 정치 안동교구의 기도회가 끝난 후 참가자들은 ‘순교자 찬가’를 부르 며 성당에서 나와 안동시청 분수대까지 구속자 석방, 농민운동 탄 압 중지, 긴급조치‧유신헌법 철폐 등의 구호를 외치며 가두촛불 시위를 감행했다. 이는 안동 최초의 일이었고 유신체제 당시 전국 적으로도 파격적이고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또한 긴급조치가 지 배하던 유신체제 말기, 서울도 아닌 지방 소도시에서 일어난 예측 불허의 사태에 정권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시위대는 목성동 성당으로 돌아와 사제단과 농민회원 80여 명이 무기한 항의농성 에 들어갔다. 당시 언론은 ‘죽창으로 무장한 폭도들’이라고 허위 보도했지만, 안동 시민들은 저녁이면 거리에 나와 농성장에서 나 오는 옥외방송을 들으며 더위를 식혔고, 경찰 포위망을 뚫고 격려 방문을 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안동을 지원하기 위해 가톨릭 이 이끄는 기도회와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후 8월 9일 원주‧청주, 8월 20일 명동성당에서 1만명이 운집한 가운데 주교 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주최 전국 최대의 기도회가 열렸고, 안동의 저항은 인천‧수원‧광주‧전주‧마산으로 확산되었다. 형집행정지 로 출감한 문정현‧함세웅 신부는 다시 구속됐다. 이미 특정 개인이나 안동지역에 국한된 수준을 넘어 전국적으 로 비화한 저항의 움직임을 물리적으로 은폐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정권은 대국민 선전작업을 통해 사건의 본질을 흐리는 희석과 왜 재오는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되었다.